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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악초등학교 금악리 벵듸가름   중가름  하르방당  오소록이동네  웃동네  할망당  생이못  금오름 · 진지동굴  새새미 코스 분기점  동가름 새가름 각생이네   만벵듸묘 역 처녀당  포크빌리지   궤동산  포제단  벵듸못  벵듸못 금악건강증진센터(4·3길센터) 명월리 상명리  가시리 본동 4·3성터 고야동산  한씨방묘   구석물당  면암 최익현 유적비  마두릿동산  종서물 새가름   가시천  갑선이오름  달랭이모루 가시리사무소 별관(4·3길센터) 승지물 가시리 사거리 자연사랑 미술관 가시리 창작지원센터 가시리교회 가시리체육공원 가시리가시리 민오름 어우눌 조설대 고인돌 사평마을 경찰파출소 옛터 선달뱅듸 몰방애터 해산이동네 고지레 오라1구 공회당 옛터 정실 본향당 월정사 연북로 연북로 오남로 오일뱅크 하나로마트 SK LPG충전소 1136 산림조합 나무시장 한라도서관 제주아트센터 제주연구원 오라 초등학교 보건소 사거리 한천 KBS 제주방송국 한국은행 제주본부 두두리동산 제주 꿈바당 어린이 도서관 가새기 오름 정실 선덕 어린이집 JIBS제주방송 1 1 2 3 4 5 2 3 4 5 6 7 4·3길 센터 (연미마을회관) 민오름 오라 주민센터 연북로 제주 한림 금악마을 4·3길 제주 표선 가시마을 4·3길 제주 오라동 4·3길 만뱅듸묘역 이곳 일대 지명이 만뱅듸라서 묘역 명칭을 만뱅듸묘역이라고 한다. 이 곳에 안장된 영령 들은 195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예비 검속이란 명목으로 송악산 섯알오름 일본군 탄약고 터(현, 백조일손묘역)였던 곳에서 무참히 학살된 무고한 민간인들이다. 유족들은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살다 6년 만인 1956년 3월에야 시신을 수습하여 이 곳에 안장하였다. 동가름 동가름은 동쪽에 위치한 동네라는 의미로 4·3 당시 50여 가구가 살았으나 소개령으로 지금은 대나무들만 남아 잃어버린 마을임을 짐작케 한다. 이 주변부터 각생이내까지 남쪽 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처녀당(아미당) 이곳은 하르방당과 할망당 사이의 7남매 중 넷째 막내딸로 태어난 처녀의 몸으로 좌정 하여 당신(堂神)이 되었다고 전해 내려오는 주요 민속 신화지역이다. 지금도 그 문화가 계승되고 있으므로 이곳을 방문할 때는 경건한 자세로 예를 갖추어야 한다. 4·3 당시 이 당에 숨어있다 경찰에 잡힌 무장대 간부가 당 건너편 밭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큰 칼로 목이 베여 죽임을 당했다. 그의 시신은 밭에 버려지고 머리만이 관덕정 마당 깃대에 걸렸다고 한다. 새가름 1948년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었다. 한때 20여 가호에 1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기도 했던 마을은 잿더미가 되었고, 주민 들은 인근 마을 등 주변으로 흩어졌다. 1949년 마을이 재건되면서 2가호가 돌아 왔으나 또 다시 마을을 떠나면서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고인돌(오라지석묘 1호) 지석묘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의 무덤 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돌멘, 고인돌이라고 불려 지기도 하고, 제주도에서는 돌배라는 전설도 깃 들여져 있다. 외부의 모양은 시신을 안치하도록 판자 모양의 돌을 사용하여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큰돌을 올려 완성했다. 지석묘는 한반도 본토에서 제주를 거쳐 일본 큐슈지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선사시대의 문화교류 또는 이동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달랭이모루 ‘흙붉은 동산’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1948 년 11월 15일 가시리 주민 12명이 희생된 곳 이다. 이후 마을 주민들은 소개하라는 명령에 따라 해안으로 내려가거나 주변 산으로 피신 하거나 선택을 해야만 했다. 선달뱅듸 선달뱅듸에는 4·3당시 7호의 주민이 거주했다. 1948년 11월, 토벌대의 소개령과 초토화 작전 으로 마을주민들은 강제로 이주를 해야만 했고 불타버린 마을은 끝내 복구되지 못해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이곳에는 아직 그네를 매달아 타고 놀던 큰 나무와 마을 주민들이 드나들던 올레와 하천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웃동네 잃어버린 마을 비석이 세워진 이곳은 4백여년 전에 설촌된 유서깊은 마을로 강씨, 김씨, 박씨, 이씨, 송씨, 홍씨 등 38호에 141명의 주민들이 밭농사를 하고 우마를 키우며 정겹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11월 21일경 소개령에 의해 마을은 전소되어 폐촌이 됐고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 협재리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 와중에 무고한 주민 8명이 희생 되었다. 그 후 금악리 재건 명령에도 웃동네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지금은 당시 마을 대소사를 의논하고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며 뛰놀던 팽나무와 월대 그리고 처참히 부서진 방에들만이 버려진 채 그 날의 비극을 대변하고 있다. 한씨방묘 600년 전 가시마을을 설촌한 청주한씨 한천과 그 아들의 묘이다. 1392년, 한천이 제주에 들어 오고 가시리에 정착하는데 대제학을 지낸 학자 라는 것이 알려져 이웃마을 등에서 학문을 배우려는 이들이 찾으면서 가시마을이 형성 됐다. 한씨방묘는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제주도의 묘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되어 문화재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0-2호로 지정되었다. 조설대 1905년 제2차 한일협약(乙巳條約)의 체결 후 1910년 일본이 한국을 한일합방하자 12인의 유림 들이 ‘집의계(集義契)’를 결성하고 이곳에 모여 항일 의 의지를 굳히고 울분을 달래며 광복투쟁을 결의 하여 석벽에 ‘조설대(朝雪臺)’를 음각하였다. 조설 대의 뜻은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뜻이다. 월정사 월정사는 제주 최초의 선원이다. 4·3이 일어난 해인 1948년 12월 토벌대에 의해 월정사 건물 5동이 불태워졌고, 김석윤 스님의 아들 김덕수 스님이 토벌대에 끌려가 ‘박성내’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집단학살을 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1949년 2월에는 관음사를 방화하고 내려오던 토벌대에 의해 법당마저 불태워져 월정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다. 4·3이 끝나고 몇몇 스님이 월정사 터에 건물을 짓고 사찰의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현재 월정사의 모습을 갖췄다. 면암 최익현 선생 유적비 제주도 청주한씨 입도조 한천은 고려 말 공양왕 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기도 했다. 고려 공양왕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자 한천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392년 제주에 들어온 한천은 가시마을을 설촌했다. 1879년 제주로 유배를 왔던 면암 최익현이 한천의 후손들이 제주에 살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감격하여 후손들에게 비문을 써주었다. 당시 비문과 비석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어우눌 어우눌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4·3사건은 이 마을을 피해가지 않았다. 폐촌 후 일부 주민들은 오라리 등지로 삶의 근거지를 옮겨야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눈 덮인 벌판을 헤매야 했다. 이 마을 에서 당시 주민 100여 명(호수 23호) 중 약 13명이 희생 되었다. 연미마을은 뒤늦게 재건이 됐지만 ‘어우눌’은 끝내 복구되지 못했다. 마두릿동산 4·3 당시 마을 주민들이 보초를 서던 곳이다. 고야동산에서 세워진 깃대를 내리는 방식 으로 신호를 보내면 이곳에서 그 신호를 보고 마을 주민에게 다시 신호를 보냈다. 4·3 당시 에는 마두릿동산에서 고야동산이 보였지만 지금은 나무들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그때 당시 경찰을 ‘검은개’라고 부르고, 군인을 ‘노란개’라고 부르던 것을 보면 마을주민이 외부인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해산이동네 해산이는 연미마을회관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4·3사건 이전에는 모두 10여가구 50 여명의 주민이 모여 살았으나 4·3사건으로 마을이 폐허가 된 이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잃어버린 마을이 되어 버렸다. 곳곳에 깨어진 그릇조각이 널려졌고 집이 있었던 자리에는 대나무가 숲을 이뤄 집터였음을 말해준다. 제주4·3사건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우리나라 국민의 아픈 역사입니다. 4·3의 영혼들은 붉은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없이 스러져 갔습니다. 그 날의 뼈아픈 고통을 생생하게 몸으로 기억하는 생존자들도 사실상 마지막 생애주기를 맞고 있습니다. 제주특별자치도가 4·3 70주년을 맞아 2018년을 “제주 방문의 해”로 정하고 4·3이 전하는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알리는 전국화·세계화에 나섭니다. 사회통합을 위한 추모·위령, 그리고 화해와 상생을 통한 평화와 인권의 가치로 승화되기를 기원하기 위함입니다. - 4·3희생자 14,233명, 유족 59,426명 금오름과 진지동굴 ■ 금오름 해발 427.5m, 분화구의 바깥둘레는 1,200m로 금악리의 중심에 있으며 금물악(琴勿岳, 今勿岳), 거문오름(黑岳), 금악(今岳, 琴岳) 등 여러 이름 으로 불리다 지금은 금오름으로 불리고 있다. ■ 진지동굴 제주도 서부지역 전체를 볼 수 있는 금오름은 지리적 요충지로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진지 동굴이 만들어졌다. 4·3 당시 주민들이 이 곳 에서 망을 보다 경찰이 마을로 다가오면 붉은 깃발을, 떠나가면 하얀깃발을 흔들어 마을에 알리기도 하였다. 진지동굴은 마을 재건 이후 2개를 남기고 메워버렸다. 4·3을 주제로 한 영화 <지슬>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종합안내판 마을의 역사, 4·3길 이동구간을 알아보세요 설명안내판 4·3유적지, 마을 명소의 이야기를 알 수 있어요 이정표(지주형, 걸이형) 갈래길을 만나면 이정표의 도움을 받으세요 안내 리본 4·3길 중간중간 희생과 순결을 의미하는 리본을 따라가 보세요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면 천천히 주위를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4·3길 안내 표시가 여러분을 올바른 길로 안내할 것입니다. 안내 표시 4·3길 문화해설사 운영 4·3길 웃동네 가는길 거리 7km 시간 2시간 동가름 가는길 거리 5km 시간 1시간 30분 가시리4·3길 가는길 거리 9km 시간 3시간 해산이동네 가는길 거리 6.5km 시간 2시간 선달벵듸 가는길 거리 5.5km 시간 1시간 30분 금악초등학교 ▶783-1, 783-2 금악리 ▶783-1, 783-2, 785교통정보 가시리 ▶222, 295, 732-1, 732-2교통정보 연미마을회관 ▶434, 436교통정보 4·3길 문화해설사란? 4·3길을 방문하는 도내·외 탐방객들에게 4·3의 역사, 문화, 자연 등 올바른 4·3을 알려주는 전문가입니다. 해설시간 10:00~17:00 예약방법 제주특별자치도 4·3지원과 ☎ 064-710-8454 홈페이지 4370jeju.net 4·3길을 걷다 제주 4·3길 해설 신청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