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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밀린 무장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채 퇴각했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학교에 수용 중이던 주민 80여 명은 1월 10일과 12일 두 차례에 걸쳐 학교 동쪽약 200m 지점(의귀리 1506-6번지)의 밭으로 끌려가 학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구실로 군인들이 양민들은 보복 살해해버린 것이다. 학살 현장에는 죽은 어미의 젖을 빨다 지쳐 쓰러져간 갓난아기의 넋도 있었다. 시신들은 원만한 수습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일부는 유족이 거두어 간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시신들은 흙만 대충 덮은 채로 방치되고 있었다. 썩어가던 시신들은 그 해 봄 의귀·수망·한남리 주민들이 의귀리 중심지에 성을 쌓게 되면 서 한남리 민보단원들에 의해 ‘개탄물’ 동쪽(의귀리 765-7번지)으로 옮겨졌다. 세 개의 구덩이에 던져져 ‘멜젓 담듯’ 매장되고 만 것이다. 사태가 끝나자 유족들은 인고의 세월은 견디며 점차 묘역을 가다듬어갔다. 1964년 12월에 부모형제가 묻힌 땅을 사들인 데 이어, 1968년 봄에 봉분을 단장하고 산담을 쌓아 해마다 벌초와 제례를 행해왔으며, 1983년 봄에는 의로운 넋들이 함께 묻혔다는 의미로 ‘현의함장묘( 顯 義 合 葬 墓)’ 라는 이름의 묘비를 건립했다. 그런데 마을길을 몇차례 넓히면서 묘역이 도로에 돌출되는 상황에 이르자 새로운 유택조성이 필요하게 됐다. 이에 유족들은 2002년 6월부터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으고 관계 요로에 간청한 끝에 수망리 ‘신산모(아래아)루’ 지경 (893번지)에 새 묘역 부지 5722m^2를 마련해 이장케 됐다. 사건발생 54년 만인 2003년 9월 16일 이장을 위해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서쪽 봉분 17구, 가운데 봉분 8구 동쪽 봉분 14구 등 총 39구 (남자 15구, 여자 7구, 청소년 추정 2구 포함한 성별 미상 17구)가 다수의 유물과 함께 확인됐다. 그러나 어린이의 유골을 비롯한 수많은 유골들은 이미 세월의 더께에 흙이 되어서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유족들은 한 구 한 구의 유골로 나누지는 못했지만 세 봉분의 흙 한 줌씩을 함께 옮겨 넣음으로써 흩어진 유골들을 대신했다. 통곡과 오열 속에 발굴된 유골들은 봉분별로 화장하여 양지바른 이 곳, 지세 좋은 자리에 고운 잔디 입혀 2003년 9월 20일 안장됐다. 서기 2004년 10월 7일 희생된 넋들 의귀리 (명단 생략) 수망리(명단 생략) [영문]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