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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한편 ‘오라리 방화사건’은 1948년 5월 1일 낮 시간대에 오라리 연미마을에 우익청년단원들이 들이닥쳐 민가 10여채를 태운 사건임. 당시 경찰은 이를 인민유격대의 행위라고 미군정에 거짓으로 보고했음. 이로 인해 국방경비대(지금의 군대) 제9연대와 무장대 사이에 진행 중이던 ‘4·28평화협정’이 결렬됐음. 이는 이후 미군정과 군.경 토벌대가 벌이는 강경진압의 명분이 됨. 유적지 안내판 설명1 [한글] 옛 배움의 터전 (옛 오라 공립 국민학교 터) 오라동에 학교가 없어 배움의 길을 걷고자 하는 많은 청소년들이 배우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긴 마을 유지들이 학교 부지를 마련하여 1946년 2월 1일 이 곳에 “오라 공립 국민학교” 를 개교했다. 그러나 4·3 사건의 발발로 학교가 불타고 교직원이 순직하는 비운을 당하자 1948년 12월 6일 자진 폐교하게 되었으며 그 후 오라2동 1380번지 (현 오라초등학교 부지) 로 옮겨 “ 제주남국민학교오라분교” 인가 과정을 거친 후 1951년 9월 14일 “오라국민학교” 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문] 없음 유적지 안내판 설명2 [한글] 오라리(연미마을) 방화사건 이곳 연미마을 4·3사건 당시 이른바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한 역사의 현장이다 . 우익단체원의 가족이 무장대에 의해 희생되고 장례를 마친 1948년 5월 1일 우익청년단원들은 몇몇 사람들의 가옥 10여채를 지목하이 방화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무장대가 우익청년단원을 추격하자 경찰과 경비대가 출동하는 등 공방이 이어졌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단순히 이념적 갈등으로 빚어진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 미군 비행기에 의해 공중과 지상에서 촬영된 "제주도의 메이데이 (May Day on Cheju-do)"라는 영상기록을 통해 미군정이 강경진압의 명분으로 삼으려는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고 있다. 그 이유는 뒤이어 이어지는 5.3귀순공작, 5.5수뇌부 회담, 5.6연대장 교체, 5.10단독선거 등 일련의 주요 사건 길목에 "오라리 방화사건"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4·3 역사의 한복관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이 장소가 더 이상 잊히지 않고 후세들에게 교육의 현장으로 길이 기억될 수 있도록 4·3 70주년을 맞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