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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들어갔고 좌익진영이 주관하는 3·1절 행사는 당초 계획대로 강행되었습니다. 3·1절 기념대회는 각 읍·면 별로 치러졌고 제주북국민학교에는 제주읍·애월면·조천면 주민 3만 여명이 모였습니다. 행사 후에 군중들은 가두시위에 나섰는데 관덕정 부근에서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차여 다치게 됩니다. 이때 기마경찰이 어린이를 방치하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은 기마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관덕정 부근에 포진했던 무장경찰은 이에 대응하여 총격을 가하면서 구경나온 민간인 6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15세 국민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총격에 피살된 여인도 있었습니다. (그림설명)발포(강요잭 작). 관덕정 광장에서 무장경찰의 발포로 구경나온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이 총격사건 이후 제주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고, 이듬해 4·3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기점이 되었다. 이 발포 사건으로 제주도내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으나 미군정과 경찰이 사태 수습보다 시위 주동자 검거에 주력하자 1947년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발로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청 등 관공서는 물론 은행·회사·학교·운수업체 등 도내 156개 기관단체 직업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현직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민의를 들으려 하지 않고 일제 강점기의 경찰들과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을 동원하여 총파업에 가담한 이들에 대한 가혹한 탑압을 하였고 고문으로 사망까지 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면서 민심의 분노는 끓어올랐습니다. 이렇나 상황 속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1948년 4월 3일 새벽에 12개 경찰지서와 우익인사와 우익청년단체를 급습하면서 총파업을 통한 항쟁은 무장투쟁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사진설명)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서북청년회. 제주도가 '붉은 섬'으로 지목되면서 국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빨갱이사냥을 한다는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하였고, 이는 4·3사건 발발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전개 미군정은 무장봉기가 발생하자 4월 5일 전라남도 경찰 약 100여명을 응원대로 제주에 급파하는 한편 서청(기독교서북청년단) 단원들도 증원하였습니다. 또한 4월 17일 미군정은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 사태진압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에 비해 민족적인 성향이 강했던 9연대는 이 사건을 경찰 및 서청과 같은 극우 세력의 횡포로 야기된 것으로 판단하고 무장대와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그리하여 1948년 4월 말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측 군사총책 김달삼이 만나 "72시간 안의 전투 중지, 무장 해제와 하산이 이뤄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상을 성사시켰습니다. 그러나 미군정 하지 사령관은 무력 진압 방침을 세웠고, 평화협졍 직후인 5월 1일 우익청년들이 오라리 마을에 방화를 저지르고 미군정과 경찰이 이를 폭도들의 행위로 조작하면서 김익렬 중령이 해임되고 박진경 중령이 9연대를 지휘하면서 평화협상은 결렬되고 강경진입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진설명)제주에 모인 군경 최고 수뇌부. 1948년 5월 5일 딘 군정장관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 사령관 등 군경 수뇌부를 이끌고 제주를 방문해 비밀회의를 열었다. 무장대는 5월 10일 남한의 단독 선거에서 적극적인 거부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5월 7일부터 10일까지 선거사무소를 집중 공격하고 선거관계 공무원을 납치-살해하는 한편, 선거인명부를 탈취했습니다. 5월 10일 선거 당일에 무장대는 중문-표선-조천 등지에서 투표소를 공격했으며 다수의 주민들은 무장대에 동조하여 입산, 선거를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전국 200개 선거구 중에서 3개의 선거구가 있던 제주도의 북제주군 2개 선거구가 유일하게 투표율 미달로 무효처리 되었습니다. 미군정은 5·10 선거의 거부를 자신들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발아들였고 8,000여명을 검거하는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리한 토벌에 반대하여 9연대 병사들이 집단으로 탈출하였고 6월 18일에 9연대장 박진경이 부하에게 사살됩니다. 미군정은 8,000여명에 달하는 입산자를 붙잡으며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대학살 (사진설명) 대한민국 정부 수립. 통일정부의 건설을 바라는 여러 정치세력들의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