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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묘역이 정비되어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 희생자 수는 62명인데 이 장지에는 46위가 안장되어 있으며 그외는 개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2004년 8월 7.7 만벵디 유족회 [영문] 없음 안내판 설명 2 [한글] 건립경위 이곳에는 1950년 8월 20일(음7.7) 새벽 송악산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희생당한 한림지역 예비검속자 52명과 무릉지서 구금자 9명 등 모두 예순한 분의 원혼들이 영면하고 계십니다. 일제의 속박 속에서 벗어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1948년 발생한 4·3사건과 뒤이은 한국전쟁 등의 대혼란기에 예비거목이란 명목으로 강제연행된 한림지역 주민들은 당시 한림어업 창고에 구속되었다가 무릉지서 구금자와 함께 희생되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순박한 농민이나 2세 교육에 전념 전념하던 교사, 하물며 여자까지 포함된 희생자들의 시신은 인도를 요구하는 유족들의 간절한 염원을 무시하고 출입을 통제하는 바람에 암울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손꼽아 기다리던지 5월 7개월! 1956년 3월 30일에야 비로소 썩어 문드러진 시신이나마 수습할 수 있었으나 유택을 마련할 장소가 마땅찮아 고심하던 차에 유족인 임태봉 여사께서 지세 좋은 명당을 쾌척하여 주심으로 이곳에 안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반세기가 넘어서야 구천을 떠돌던 원혼들을 떳떳이 해원하고 이해와 관용의 3세기 도민대화합의 기틀을 다져 평화와 인권이 살아 숨 쉬는 상생의 터전으로 삼고자 제주도와 북제주군의 지원에 힘입어 삼가 이 빗돌을 세웁니다. 서기 2001년 9월 6일 7·7만벵디 유족회 근립 [영문]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