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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시절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옥고를 치렀지만 한국전쟁 때 좌익으로 몰려 총살당한 고 장재성(1908∼1950) 선생을 기리는 행사가 장 선생 모교에서 열렸다. 장재성 선생은 광주고보 5학년 때인 1926년 11월 ‘성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사회주의를 연구하며 훗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원동력을 만들었다. 1929년 10월30일 일본인 학생들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양국 학생 간 싸움이 일어나자 한국인 학생에게 ‘식민지 교육 철폐’ 등을 요구하도록 움직였다. 이 때문에 양국 학생 간 싸움은 일제 항거로 발전될 수 있었다. 같은해 11월13일 일제 경찰에 붙잡힌 장 선생은 시위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자 중 최고형량인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해방 정국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을 지냈고, 남북 분단에 반대해 세차례 북을 오갔다는 이유로 1948년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다.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장재성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정권은 1962년 독립유공자 표창 대상자에 장재성을 포함했다가 ‘해방 후 조선공산당 가입’을 이유로 서훈을 취소했다. 출처 : 한겨레신문 2020-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