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page

第-編 순국열사 및 독립운동가 • 99 2. 스스로 온 몸 불태워 삼보에 공양 소신공양에 대한 불교적 근거는 <법화경 > 약왕(藥王)보살(홉障)본사품(本떼퍼) 제23 ‘。 체(-切)중생(짧生) 희견(喜見)보살(홉魔)께서 일월( 1크꺼 )정명(浮明)덕(德、)여래(如來) 회상에 서 수행 정진할 때 현(現)일체(-切)색신(~身)삼매(三妹)를 증득(證得)하여 육신으로 공양 힘-을 서원하고 향유(香파1)를 옴에 바르고는 부처님 앞에서 하늘의 보배 옷으로 폼을 감아 거기 에 향유(香꽤)를 끼얹고 몸을 스스로 태워 공양을 올려 불은(싸恩)에 보답’ 하는 대목 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불교사에는 소신공양에 대 한 의지와 정신을 보인 몇몇 스님의 이야기가 전 해질 뿐이다. (98. 7. 8 현대불교 제 181호 도필지 기자의 글에서 ) 3. 소신(燒身)등공(購호) 사리탑(舍利港) 비문(陣文) 대종사(大宗剛)의 법명은 원상(圓相)이요, 충담o며따)은 법호(法減)라 속성(깜性)은 이씨 로 전주(全씨‘1)가 본관(木實)이며 속명(倚名)은 길수(람秀)이다. 서기 1913년 음 5월 8일 경 기도(京織道) 가평(지11平)에서 성균관(成싹館) 박사( 1행士)인 부(父) 승로(承老)와 모(母) 연안 (延安) 차씨(쁘fE;)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대종사(大宗때)는 일찍 이 부친으로부터 한 학(漫學)을 배우다가 뜻한 바 있어 1929년 4월 8일 17세의 나이로 서울 삼각산(三角山) 숭 가사(1曾빼칸)에 출가(바家)하여 박심월(씨、心月) 화상(和尙)을 은계사(恩成떼)로 모시고 시-미 겨1(沙爛패)를 수지(受持)하였다 20세에서울 봉은사(꿇恩놓)에서 사미(沙爛) . 사집과(VCI集 科)를 수료한 후 국내 지1방(~~.方)의 강원(팎|양)과 선원(피댄院) 중국의 연변(延邊)과 장춘(長 휴) 지역까지 널리 행각(行뼈J)을 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는 한편, 정혜(定慧)를 겸수 (銀修)히-였다. 또 해방되기 전해인 1944년 4월 8일에는 서울 승가사(뺨이U츄)를 창건(創렐) 하고 주지에 취임하였으며, 삼각산(三角山) 신원사(피111元칸) 묵조(默照)화상(和尙) 아래서 사 교(四敎) 및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는 서울 관악산(冠많山) 염불암(念佛應) 등에서 선교 (따敎)의 수행을 계속하였다. 1956년 5월 가평(까l平) 호명산(虎|샘山) 감로사(tr震꿈)를 창건 하고 1973년 도정- 안에 미록(禮勳)대불상(大佛像)을 조성하였다 그때부터 감로사(tr찮칸) 와 승가사(增뻐춤)에서 20안거(安居)를 성만(成柳)하였으며 이 동안에 이 룬 법력(法力)괴­ 수행력(修行力)을 발휘하여 상구(上求)보제(훨提) 하화(下化)중생(랬生)에 진력(盡力)하느 크 보살(폼輝)이 되었다 특히 대종사(大宗|페)는 한국 정통(正統)불교종단의 부종(拉宗)수교 (樹敎)와 불법(佛法)수호(守협) 정신이 남달리 강하여 일생동안을 수행과 종교(宗敎)선양 (宣揚), 대중(大폈)교화(敎化)와 불교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대종사는 1960년에는 국묵담(鋼默懷) 종정(宗正)으로부터 구족제(具足成)와 대승보살제(大乘홈健빠)를 수지(受持) 하고 1963년 청연사(淸違켠) 능해(能海)회-상(和尙)에게 입실(入헐)건당(렐|햄)하였으며 1990 년에는 한국불교 태고종(太뀌宗) 대종사(太宗때)의 법제(法階)를 품수(꽃受)하고 1998년 5
98page

第四章 순교자
98page

第四章 순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