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page

64 • 가평의 얼과 인맥 중도파에 의한 좌우합작적 정부를 수립해보려고 하였으나 좌우의 대결이 심각한 상황에서 소기의 결실을 맺지는 못하였다. 또한 남한의 단정 수립 이 분명해진 1948년 1월 신숙은 김 구와 만나 지난 감정을 풀고 남북협상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에 매진하자고 협의하였다. 그 러나 동년 4월 19일 김구 · 김규식 · 이극로 · 홍명희 · 원세훈과 함께 북한에 가서 김일성 등과 남북협상을 벌였으나 뜻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남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 8월 15일 천도교중앙총부 도사로 추대된 그는 만화 회(萬化會)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으로 교인들의 결속과 포교활동에 주력하였다. 또, 1950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천도교보국연맹을 조직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어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 고 월남교인 보호와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57년에는 보국연맹과 청년회를 합하여 동학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61년에는 천도교 정딩-인 동학당을 설립하려고 시도하였다. 한편 그는 정치활동도 적극 참여하였다. 자유당 시절에는 민주혁신당 중앙위원장, 민권 수호국민총연맹 대표지도위원 광복동지회 부회장으로 독재정권과 투쟁하기도 하였다. 1960년 4.19 혁명 직후에는 국민각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29일 실시한 총선 시 철원으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선생의 민족운동과 항일투쟁의 공정이 인정되어 선생은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 립장을 수여받았다. 그 해 신숙은 갑작스런 중풍으로 쓰러져 4년 뒤인 1967년 11월 22이 오후 3시 가회동 자택에서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선생은 거의 인생 전부를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국권이 상실되어가는 시기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통하여 주권을 수호하려 하였고, 주권이 상실된 뒤에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굉-복이 된 후에는 민족의 통합과 통일을 위하여 활동하였으며, 단정이 수립된 후에는 민주정치의 발전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비록 주변 정세와 상황이 받쳐주지 않아 뜻을 이루 지 못한 것도 있지만 선생의 나라와 겨레를 위한 고귀한 뜻과 열정은 항상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二. 新學問의 先騙者 弘淵 羅基鋼 博士 1. 송덕비 (가평읍 읍내리 : 가평향교 앞) 가. 비문 (전면) 弘써| 羅基f胡 博土 십뤘德、牌(홍연 나기호 박사 송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