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page

第-編 순국열사 및 독립운동가 • 61 다. 그리하여 결국은 결렬되고 말았다. 그러자 신숙은 강구우 · 장붕익 · 강수희 · 정경섭과 함께 1923년 6월 6일 윤해 등이 이끄는 창조피- 39인과 비밀회의를 개최하여 국무위원제와 국민위원제를 골간으로 하는 임시정부 헌법을 통과시켰다 37) 이 회의에서 신숙은 국민위원 회와 국무위원회의위원 겸 내무위원장으로 선정되었다 38) 신숙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연해현공산당 중앙위원회 고려부가 노령에 새롭게 임시정부 늘 조직할 것39)이라고 믿고 이민창 · 강구우와 함께 1924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되 국민위원회에 참석히 였다때) 그리고 신숙은 윤해 · 윈세훈 등의 칭-조파와 함께 블라디보스토 크에 임시정부의 최고기관을 설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거절과 공산 주의자인 이동휘 · 김만겸 · 김하구 등과의 의견 불일치로 신숙은 그 계획을 성공하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41) 다. 한국독립당 참여와 한국독립국 참가 길림 에 돌아온 신숙은 만주에서 조직되거나 조직과정에 있던 참의부 · 정의부 · 신민부를 탐탐하지 않게 여겼던지 그 해 중엽 다시 북경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한교동지회 (韓橋同志曾)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42) 그러나 그는 정치활동에 불만을 느끼고 1924년 10월 경 다시 길림으로 이주하였다가 얼 마 뒤에 액목현(賴챔縣) 교하(政河) 지빙에 가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그 결과 천도JlL 납법구종리원(拉法構宗理院)을 설립할 수 있었다_43) 연락을 위하여 1925년 2월 길림 에 나와 만인(滿人)의 객점에 머무르던 중 신숙은 이-들 원균(元均)의 서신을 받고 가족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하얼빈 북쪽 취원칭-(聚팽핸)으 로 가 박경종(朴慶鍾)으로부터 토지 4일경( 日親)을 마련한 후 그 해 4월 가족들을 오게 하 여 그곳에서 함께 생활하였다.얘) 이후 신숙은 가족과 함께 1926년 3월 하얼빈 외각 태평촌 (太平村), 동년 10월 중동선 빈현(쓸縣) 이도하자(二道河子), 1927년 2월 초 이도하자 부그 송봉산(松峰山)으로 전전하며 농사를 짓고 생활하였으나 곤궁한 형편을 변하기 어려웠 다.45)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송봉산에 신창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아동늘 을 교육히-였고, 쌍성(딴城)과 빈현 지역의 한인들과 쌍빈지방자치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어 한인들의 권익을 옹호하였다 46) 37) r한국민족운동사료J , 중국펀 , 309면 38) r한국민족운동사J , 임정편 11 자료2, 653면. 39) 國會圖書館 r島山 安昌浩 全集 <1>J 1997, 102-103면 40) 國會圖홈館 r島山 安昌浩 全集 <1>J 1997 , 96면 41) (1924.7. 31) , 외무섬사료관문서, 3권 4-3-2 42) r한국민족운동사료J , 500면, 신축 r나의 -生J , 82면. 43) 신숙 r나의 -生J , 83.84면 44) 신숙 r나의 -生J , 85면 45) 신숙 r나의 -生J , 85.86면 46) 신숙 r나의 -生J , 87.8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