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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 가평의 일과 인맥 하여 4년간 근무하면서 그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남수(金南壽) . 김님-규(金南奎) 와 함께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여 교감으로 학생들의 교육에 매진히-였고, 용산방회 (龍山행會) . 대한협회(大韓協會) 등의 단체에도 참여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5) 1900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의거가 있은 후 신숙은 일진회장 살해사건이 발생히여 경계가 강화되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16)고 한다. 일제에게 국권이 상실될 즈음부터 그는 천도교를 통한 교화활동에 주력하였다 1908년 초 민영순의 소개로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그 인격에 감화를 받은 신숙은 일진회를 통한 정치활동에 대해 참회하고 디-시금 천도교의 신자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1910년 8 월 경술국치 직후 한일합병조약에 관한 서류를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을 통탄하여 인쇄국을 나와 이후 교회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1912년 천도교 종학강습소 강사 중앙총부 도사실(道師室) 서계원(뿔計員)으로 활동 하였다. 그리고 1914년 7월 대구 대교구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916년 12월에는 다시 중앙총부 도사실 서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면서 1917년 1월 중앙총부 대종사(大宗司) 종법 원(宗法員) 겸 외사원(外훤員)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나. 3. 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활동 1919년 3 .1운동의 발생 시 중앙총부의 서계원으로 있던 신숙은 1919년 2월 27일 중앙 총부 공선관장이던 김영륜(金永倫)과 함께 보성사에서 인쇄하는 독립선언서의 교정을 보았 고 이병헌(李炳憲) . 인종익(印種益)과 함께 21,어0장의 독립선언서를 이종일(李鍾一)의 집 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독립선언서가 경향 각지로 전파될 수 있게 하였다 17) 또한 그는 자 기의 어릴 적 은사인 이규봉에게 독립선언서를 주어 가평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 18) 3 . 1운동 직후 그는 천도교인 안상덕과 이규갑 · 홍면희 · 한남수 · 김사국 등과 함께 국 내에서 임시정부 수립활동을 전개하였다 19) 그는 안상덕 · 이규갑 · 권혁채 · 홍면희와 함께 중앙대표로 선정되어 임시정부 수립활동을 지도하였다 20) 특히 그는 1919년 4월 초 상해로 부터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천도교인 홍도(洪濤, 洪振義)와 이봉수(李鳳洙) 가 입국하자 다른 중앙대표와의 회담을 주선하여 상해의 임시정부 수립 추진집단과 국내 의 임시정부 수립 추진집단 간의 협력을 이끌어 통합된 임시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 15) 申爾,{나의 -生}(일신사, 1963) , 33.34면 16) 申爾,{나의 -生}(일신사, 1963) , 34면 17) 조기주 편 r천도교종령집J (천도교중앙층부, 1983) , 152, 163, 185면. 18) 申關 r나의 -生J , 48면. [독립선언 반세기의 회고], r新A間J 262호, 1969. 3, 50면 19) 申關 r나의 -生J , 48-49면 20) 이규갑, [한성임시정부 수립의 전말], r신동OfJ 1969, 4, 176연 . 이는 이미 이현주기 그의 박사학위논문 r국내 臨時 政府 수립운동과 社會主義勢力의 형성 (1919-1923) -서울派, 上海派를 중심으로-J (인하대학교 대학원, 1999) , 81 면 에서 검토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