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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編 순국열사 및 독립운동가 • 57 처하지 못하고 심지어 외병을 끌어들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던 당시의 지배세럭에 대해 님 마욕 가졌으리라 생각된다 기존의 질서 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호구를 해결하기 위 해 기존 통치체제의 울타리에 의존하여야 하였다. 그는 16살이던 1900년에 군내면 약정(約 正) 대리로서 활동하였고, 1901년에는 북띤(~It面) 약정으로, 1902년부터 1903년까지는 가평 군 서기(書記)로서 활동하여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9) 그리고 1903년 음력 4월 4일 강 원도(江原道) 양구군(楊 디멤15) 송청리(松뿜뿔)에 가서 전부터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경주 최 씨(崔B:;) 도환(道煥)의 둘째 딸 최백경과 결혼하였다 10) 그러니까 신숙은 1900년부터 1903 녀까지 가평군과 동군 내 변(面)의 하급관리로서 평범하게 생활하였다. 그러디가 1903년 12월 1일 그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 백만 대중의 단결과 보국안민(保國 安야)의 대의(太義)를 듣고 동학에 입도하였다 11) 그는 동학의 집단적 힘에 의지하여 국가 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04년 동학이 진보회(進步會)를 설립하고 곧이어 일진회(一進會)와 합동한 후 정치활동 을 전개하자, 1905년 봄 그는 신교육을 받고, 생활에 도움이 되는 미관말직이라도 얻을 요 량으로 일진회의 본부가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1905년 경무학교(警務學校)에서 훈련 받고 2년여 간 순검(센檢)으로 활동하였으며 1906년에는 일진회에서 운영하는 {국민신보 (國f\;新服)}의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12) 그러나 그는 일진회가 을사조약을 청원하는 등 친일활동을 벌이자 이에 대해 불만을 가 졌던 것 같다 그는 1906년 경 일진회 회장인 이 용구(李容九)를 만나 일진회의 혁정을 건 의하려 하였으나 그의 태도에서 이 것 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대로 나와 일진회에서 탈퇴 하였다 13) 일진회에서 탈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07년 6 . 7월 헤이그밀사사건이 일어났다 광무 황제(光武皇帝)는 이준(李號) . 이상설(李相|힘) . 이위 종(李찮鐘)을 헤이그에 파견하여 을사 조약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려 하였으나 세 의사는 회의장에 들어 갈 수도 없었고, 이 준은 그 분을 참지 못하여 7월 14일 머 나먼 헤 이그에서 사망하였다. 그런 데 그 이준은 신 숙에게 “선비는 항상 스스로 격앙하여 고금학문을 배우는 데 마음을 바치고 성현의 사업에 힘을 기울여 일등 인물로 자처해야 한다(土當常自激돼 致心於古今學文 用力於뿔賢훤業 以 一쌓人物 딩處也)"고 격려문을 써 준 그 사람이었다 14) 신숙은 평소 이준에 대해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준 열사의 사망소식을 듣고 그는 민족운동에 한층 더 매진하게 되 었다 1907년 천도교인인 민영순(閔泳純)의 도움으로 탁지부(많支部) 인쇄국 교정원으로 취직 9) 申蕭. {나의 -生}(일신사, 1963) , 26면. 10) 申關, {U의 -生}(일신사 , 1963) , 23.24면 11) 申爾,{니의 -生}(일신사 , 1963). 23-24연. 12) 申爾,{나의 -生}(일신사 , 1963) , 29-31 면. 13) 申蕭, {나의 -生}(일신사, 1963) , 29-33면. 14) 申爾, {나의 -生}(일신사, 1963) , 24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