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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 가평의 일과 인액 6. 申關의 生灌와 民族運動 조 규 태 (수원대 강사) 가. 출생 및 성장과 천도교 활동 신숙(中關)3)은 1885년 음력 12월 29일 경기도 가평군(加平째) 군내면(킴B內面) 향교리(째 校뿔)에서 평산(平山) 신씨(마l民) 석범(디]銀範)과 전주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시 조는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띠몇郭)이고, 고려( I힘麗)와 조선 초만 하여도 가문에서 많은 관리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종(中宗) 때 신변(身휴)이 을묘사회-(6째土祝)로 고초를 겪자 그와 아우 신진(니」띔)의 후손들은 경기도 지평 (tî!i平)으로 내려와 홍천 · 가평 등지로 전전하며 생활하였다. 후손들은 관직진출이 제한되어 농업 · 상업으로 생계를 영위하여야 하였다 신숙의 증조부, 조부, 부친은 극도로 빈한하여 공부도 하지 못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고공 (l꿇工)혹은 관청의 심부름꾼으로 생활하여 가계를 꾸러나갈 정도로 그의 집은 가난하였다 4) 신숙은 일곱 살 때부터 공부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던 아버지의 배려로 집에서 한문공부 를 시작하였다 그는 남의 책을 빌려 아홉 살 때까지 {통감(痛鍵)} . {맹자(굶子)} 등을 독학 하였다. 그러다가 열한 살 되던 1895년부터 1897년까지 이규봉(李조凰) 선생의 서당인 기 남강사(仍南講舍)에서 소학(小學) . 중용( 1-1까1;) • 대학(大學) . 서전(書傳) 등을 공부하였다 5) 스승 이규봉의 신숙에 대한 회고에, “一贊柳記하고 十行햄下하는 略、明과 見末뺨本하는 慧 能과 愛敬隆親하는 禮義와 寫作煩佳의 才뭔|이 어느 모로 보든지 ~ß월꽃州聞에서 稱許하는 페{꿇일시 分I뛰하였다-6)라고 있듯이 신숙은 지혜가 출중한 신동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청일군의 출병으로 촉발된 청일전쟁의 와중에서 경 복궁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고, 1895년 명성황후(1꺼星皇尼)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던 당시의 상황을 경험하면서 신숙은 민족의식을 형성해 갔다고 생각된다. 또한 1895년 가평 에서 의병운동에 참가한 아버지7)의 실천적 활동과 그의 가르침에 영향 받아 민족의식이 더욱 공고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모회사상(滾華恩想)에 젖어 기존질서를 지키는 데 급급한 지배세력에 대하여 도 전적 태도를 취하였다 모화사상에 젖은 이인수(李寅秀)가 ‘大韓帝國과 光武를 칭하는 것은 諸 候가 王을 價稱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자 그는 ‘제후가 왕이 되고 상 놈이 양반이 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하면서 빈-박하였다.8) 또한 외세의 침략에 제대로 대 3) 申爾,{나의 -生}(일신사, 1963) , 22.23면 4) 申爾,{나의 -生}(일신사, 1963) , 22-23면 5) 申蕭,{나의 -生}(일신사, 1963) , 22-23면. 6) 申蕭,{나의 -生}(일신사, 1963) , 22.23면 7) 申爾,{나의 -生}(일신사 , 1963) , 22.23면 8) 申짧,{나의 -生}(일신사 , 1963) , 22.2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