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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編 순국열사 및 독립운동가 • 51 3. 강재 신숙 가(家)의 독립투쟁 신 일 균 (가평문화원장) 가평의 얼을 논할 때 강재 신숙(剛爾 rjl괴~)은 빼놓을 수 없는 현대사의 큰 일물이다. 그 는 조국광복과 민족통일,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한 국구투쟁으로 일관한 민족의 지도자였다 그의 일생을 게관하면 그는 민족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요, 또한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 괴 육자로서의 그의 삶은 이 시대의 귀감으로 삼아야 할 큰 족적이었다. 게항과 더불어 물밀 듯이 밀려오는 외세와 임오군변 갑신정변 등 국내외 정세가 극 혼미하딘 구한말 그는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향교리의 한미하고 고독한 빈농의 가정에서 1885년 12월 29일 태어났다.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고려조의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밤節公 'i1댈등 110의 후예 (31세손) 로 조선 초기 명조 사간공 신호(思簡公 中펀)에 이어지고 그 후 당쟁이 극심하던 중종시 대 기묘사회의 1인인 률우정 신변(橋宇추 미1까)에 이르러 그의 직계 자손들은 멸족의 화~ 피하기 위하여 경기도 지평군(현 양평군)에 왔다가 그 후 홍천, 가평 둥지로 전거하면서 대대로 당시 가장 천시히던 상업이나 농업에 종사하였다. 자손 중 교육을 받아 출중한 이 재가 나와도 감히 문무 반열에 오를 수가 없어 가세는 점점 기울고, 자손 또한 쇄미해져, 그에 이르러는 3남 4녀 중 홀로 남은 4대독자로 간신히 가계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깅-재 신숙의 집안은 직계 4대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한 드문 집안으로 꼽힌다. 그 의 부친 신석범(띠錫範)은 1895년 을미의병 항전 시 양구 기평의진의 화약제조 책임자로 침-전하여 우안(右眼)을 잃은 채 망명지 만주 땅에서 작고하였으며 그의 장남 원균(中元싹) 은 일제하 한국독립군의 장군(통신부대겸 검사역)으로서 지청천, 남대관 등과 더불어 쌍성 보, 대둔자령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바 있고, 차남 회-균( rl-'1r.야) 또한 북만주에 서 김좌진 영도의 신민부 군사위원회 별동부대에 입대하여 항일 무력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춘생, 지일청 등과 함께 중국 하남성 낙양군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교육을 받은 후 지청 처 계역에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그의 4남 선균( [IJ先均)은 육사 3기생으로 한국전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운 비- 있으 며, 징-손 현백(미鉉伯)과 3손 현좌(미鉉ftë) 또한 한국전 당시 임관,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 다 이와 같이 직계 4대가 국가와 민족 앞에 온몸을 불사른 예는 흔하지 않은 것으로 근현 대사에 있어 찬연히 빛나는 가계라 할 것이며 가평인의 자랑으로 남을 것이다. 또한 강원도 양구 의병장 군심 최도환(건心 崔道煥)은 그의 빙장(장인)으로 1905년 을사 조약이 늑결(勳結)되자 분연히 항일투쟁을 결의하고 잉:구에서 거의하여, 강원도, 경기도 등 지에서 활약하며 용맹을 떨쳤는데 그를 따르는 의군이 300여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왜적에 게 패한 후 5년여의 은거 끝에 고향에서 피체되어 1911년 춘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떼 시음을 전폐한 채 옥중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