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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가평의 일과 인맥 第二章 독렵운동 애국지사 - . 한국독립운동과 강재(剛齊) 申蕭 선생2) 1. 민족진영 통합운동을 중심으로 金 東 遠(독립기념관 전시본부장, 사학) 강재(剛齊) 신숙(덕3햄) 선생은 일제하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씨-운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 단연 손꼽히는 지도자 중 한 분이다 선생은 1885년 12월 29일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헝:교리 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 생은 가난한 집 안 살림 때문에 제대로 학문을 배우지는 못했으나 주위에서 신동이 라 불릴 만큼 총명 하였다 1905년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선생은 순검(젠檢), 신문기자 등을 거치면서 고학으 로 대동전문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또한 1907년에는 서울의 청파동에 문창학교(이봉창 의사 출신교)를 설립하여 민족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다. 선생은 그의 나이 19세 되던 1903년에 이미 동학(東學)에 입문한 천도교인이 었다. 따라 서 선생은 1911년에 강원도 전도사를 비롯 가평, 대구 대교구장, 종법사(宗法師), 교사(敎 史)편찬위원, 종학원(宗學院) 강사, 도사(道師) , 만화(萬化)위원장, 보국(保國)연맹위원장 등 천도교의 중요한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3 .1 운동 당시 선생은 의암(義魔) 손병희(孫秉熙) 선생의 명을 받아 서사 전부터 3 . 1 운동이 전국적인 의거가 될 수 있도록 주도면밀한 준비를 하였다. 3 . 1 운동 이후 선생은 3 . 1 운동이 성공적으로 되기 위하여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펴 다가 경성헌병사령부에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였다. 1920년 좀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독립운동을 꾀하기 위하여 선생은 천도교의 대표로서 상해(上海)에 건너갔다. 이 후 선생의 생명은 오직 조국을 위 해 던져졌고, 선생의 몸짓 손 짓 하나는 일제에 게는 큰 손실을,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는 조국광복을 향하는 일보의 희망 을 안겨다 주는 그러한 행동이 되었다. 2) 1987년 11월 22일 강재 신숙선샘 20주기 추무회 추모제전 자료에서 이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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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章 독립운동 애국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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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章 독립운동 애국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