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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編 순국열사 및 독립운동가 • 35 1ill5년 을사조약(ZC{I敵선)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에서 의병 A 일으켰으며 유홍석 · 이강년 의병장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유격전을 전개하여 혁혁하 처 과를올렀다 회-남의 우국우도(꿇國짧道)에 대하여는 통문인 의암 유인석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펀지 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꿇핸集(중임-집) .... 박장호가 일찍이 화서 · 중암 · 성재 세분 선생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여 우국우도(몇l팽짤道)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으나, 끝내 나라가 오랑캐에게 먹혔는데 다시 일 으키지 못하고 우리 도(道)가 사교(別敎=천주교)에 침식되었는데도 구하여 유지시키지 못하였 다. 그러므로 사우(土友)들과 더불어 뜻을 모아 힘을 다하여 성묘(聖願)를 수호하고 대의(大 義)를 강론(웹論)하여 중동(中東=강원도)의 인심을 모아서 이 원통함을 풀고자 하나 도와줄 분(유인석)을 기대하고 있다. 이 천지(天地)에서 이 근심을 책임 맡고 젊어질 자는 우리 세분 선생님에게서 공부한 사 람을 제쳐놓고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는가 .... J 의암 유인석은 화님이 보낸 이 편지를 두고두고 보면서 1914년 7월에 답하기를, 「형 이(박장호) 이 책임을 젊어진다면 내가 비록 못나고 병들었지만 죽기 전에는 힘A 다하여 도와 드리겠다」 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의암과 화남은 국내에서는 물론 국외 만주에서도 두터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항일활동(抗日活動)을 하였다. 4. 만주(滿洲)에서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1910년 조선이 일본에 의해 깅-점당히-지- 국내에서는 의병투쟁에 어려움을 느낀 화남은 외아들 필보(병항)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박장호 · 이진용 · 조맹선 의병징-은 장백 · 무송 · 임강현 등지로, 유인석의병장은 서간도 집안현으로, 조병준의병장은 관전현 환인현 등지로 이동하였다. 화남은 1919년 3 .1 운동 이후 국내로부터 이주하여 오는 동포들의 생계를 둡기 위하여 농무계(많務꽃)를 조직하고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19년 4월 화남은 조맹선 · 백삼규 · 조병준 · 전덕원 등의 의병장과 유림대표, 보약사 대 표, 향약계 대표, 포수단 대표 등 560명이 유하현 삼원보서구 대화사(大花料)에 모여 전열 4 가다듬고 통일된 항일군사조직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독립쟁취를 위한 항일군사조직 단일기구로서 “대한독립단”이다. 대한독립단은 도 총재부와 총단과 지단 남민-주 제1사단 등의 조직을 갖추었다. 박정-호 총재가 이끄는 대한독립단 간부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 박징-호 : 도총재 홍천의병장, 경기 가평출생, 이항로 문인 @ 벡삼규 : 부총재 의병장 평북 태천출생 박문일 · 유인석의 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