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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編 순국열사 및 독립운동가 • 25 장했다. 이러한 상소운동이 실패하자 전국에 걸쳐 반일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포고팔 도사민 제告八道土民〉 을 각지에 보내 우리 민족이 딩당한 자주민임을 밝히는 동시에 비통한 전도(前途)를 예시하고, 오직 우리는 궐기투쟁해야 할 것과 을사5적을 토륙(討쳤)할 것, 이들이 국왕을 압박하여 일본의 포로로 하려는 등의 흉악한 음모를 방지할 것, 결세(원脫) 상닙-을 거 부하고 일본이 경영하는 철도를 타지 말고 군기(單캠) .총포(統패) 이외의 일본상품을 사지 말 것 등을 촉구했다. 1ffi3년 1월 충청남도 노성의 궐리사( I빼里洞)에서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시 국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일치단결하여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 전라북도 태인 의 임병찬(林炳瓚)과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수립하고 113명의 지사들과 〈동맹록 同盟錄〉 을 작성한 후 호님-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동참을 촉구했다.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1단院) 에서 각지의 유생 및 의병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창의구국(엽義救國)을 결의하고, <창의토적소 꾀義討빼流〉 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했으며 격문을 열읍(列핀)에 보내 호응을 촉구했다. 일본정부에 대한 문죄서인 〈기일본정부 奇 H 本政府〉 에서는 강화도조약 이레 일본이 저지른 기민-적 배신행위를 16조목에 걸쳐 열거하면서 조선과 일본 나아가 동양 전체의 평회를 위해 히i류 속히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어 태인읍을 무혈점렁하여 그곳의 무기와 세금을 접수했으 며, 이튿날 정읍에 도착해 무기와 병력을 증강했다. 다시 순창으로 행군, 많은 주민과 이속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여 소총과 회-약 등 무기를 수합했으며 걱-지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여 의병 의 수는 ~멍에 달했다 이떼 전주경무고문지부(全j‘|‘|짝務顧問支部) 소속 경찰대가 출동하자 이를 물리쳤다.6월 8일 독성에 들어가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과 양곡 등을 접수한 후 순창으로 돌아왔다. 이때의 의병 수는 ~명으로 증가했으며 소총 등의 무기를 갖추게 되어 전 력이 증강되었다 6월 11일 횡-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고종의 선유조칙을 전히-며 해산을 종 용했으니-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이날 전주관찰사 한진창(펴趙읍)이 이끄는 전è.}북도지방진위 대 의 포위공격을 받아 임병찬 · 고석진(高꺼鎭) 등 12명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후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끈질긴 회유와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임병찬괴- 함께 쓰시미­ 섬[對嗚鳥]에 유배되어 엄원위수영(嚴原術成營)에 감금되었다 그곳에서 단발을 강요당하자 단 식으로 사절(死節)하기로 결심하고, 임벙찬에게 구술( I끼述)로 유소(造流)를 전했다 유소에서 그 는 왕에게 의뢰심을 버리고 자립정신을 굳힐 것을 간청하고, 국제관계에 비추어 볼 때 일본은 반드시 미구에 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단발조치가 철회되자 단식을 중지했으나 그해 11월 병 을 얻어 12월 30일 순국했다. 이듬해 1월 유해가 봉환되었다. 문집으로 〈면암집〉 이 있다. 1S62 년 꺼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 최익현 선생의 유고 0 유배지 (대마도)에서 쓴 시 백발을 휘날리며 밭이랑서 뛰는 것은 초야의 충성심을 바치려 함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