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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민영환[閔泳t웰 1861 (철종 12) 서 울-1905(광무 9). (1) 공적(한말의 정치가). 미씨 정권의 세도 속에서 관직에 진출했고, 2차폐의 해외 여행으로 견문을 넓혀 왕에게 개혁정책을 권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기울자 자결로 일제에 헝-거했다. 본관은 여흥. 자는 문약(文若) , 호는 계정(桂底) . (7 ~) 출신 및 초기 관직생활 아버지는 선혜청당상을 지낸 겸호(歌鎬)이며, 뒤에 큰아 버지인 태호(台鎬)에게 입양되었다. 1877년(고종 14) 동몽 교관이 되었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정자·검 第-編 순국열사 및 독립운동가 • 21 열 -수찬· 장령 등을 거쳐, 1881년(고종 18)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대사성과 도승지를 지냈 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생부 겸호가 피살되지- 벼슬을 내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뒤 도숭 지 ·이조참판·한성우윤·예조판서 · 형조판서 - 한성부윤·독판내무부사 등을 지냈다. 1895년 8월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민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부임하지 못했다. 친러 파가 축출되고 친일적 경헝: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낙향해 두문불출했다. (나) 외교활동 1896년 특명전권대사로 학부대신 윤치호(jl致昊), 2등서기관 김득런(金得練), 3등서기관 김도일(金道一) 등과 힘께 4월 1일 인천을 출발해 상하이 ·나가사키·도쿄·밴쿠버·뉴욕 등을 거쳐 유럽 대륙의 신문명을 보고 5월 20일 모스크비-에 도착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뒤 약 3개월 동안 러시아 각지를 둘러보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10월 21일 귀국했는데, 그의 여행은 독립신문에 그 내용이 소개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1897년(광무 1) 1월에는 다시 영국·독일·프랑스·러시 아·이 탈리아·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가 되 어 3등서기관 이 기(李I奇) , 서기 김조현(金祚鉉) 김병옥(金秉玉) .손병균(孫炳均) 등과 함께 영 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했다 도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러 니콜라 이 황제에게 국서와 고종의 밀서를 전달했다. 2차례에 걸친 해외여행을 통해 유럽의 제도를 모방해 정치제도를 게혁하고 민권을 신장해 국기-의 근본을 공고히 할 것을 여러 번 고종에 게 건의했는데, 그중 군제에 관한 건의가 받아들여져 원수부(元帥府)에 의한 육군통솔이 이 루어졌다. 그뒤 서재필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를 측면에서 후원하다 원로대신들의 무고로 파 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참정대신·탁지부대신·장례원경·헌병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며 훈1 둥(勳一等)과 태극장(太極章)을 받기도 했다. 1904년 이후 내부 학부 대신을 역임했으나, 。 제의 침략을 맹렬히 반대하다가 시종무관장이 라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1905년에는 참정 외부 대신을 역임했으나 다시 시종무관장이 되어 순국할 때까지 그 직위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