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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 가평의 얼과 인맥 仁修德 積陰멜惠之餘擇 물非顯現乎 鉉歲公之長男 斗河 成均節進士 光|흉參奉 次男 斗房通 政大夫혔知中樞府使 亦寫繼舞子 公之훌階前左右 행成品字形 是則公之二子 寫親萬世 守幕 之造計也 寫其後짧者 홉不奉暴歲 擺者 亦公之尼孫一而 今此執筆 心塞語흉 X難積考 當時 現합之如何 물敢休得- 公之道志、之萬一乎 휠흠鉉立石只1t=훌標而 以候l즙之君子責뚫 땀紀四二八八年Z未二月 十三代孫 基元 詩擁 2. 비문 해석문 증 통정대부 갑산부사 공 비문 공의 이름은 희적(希籍)이니 계출 인동이씨고 시조는 금용(金댄)이며 고려 삼중대광 보 국신호위상장군평장사이시 고 한신(漢l효) 할아버님의 관직은 증 자현대부병조판서예조참의 를 지 내시 고 가평군 복장포로 낙향하셨는데 공의 5대조가 되신다. 고조부의 이름은 삼(參) 이시고 통정 대부 덕원부사를 지내셨다. 증조부의 이름은 천열(天烈)이시고 통정 대부병조참 의시며 할아버 님의 이름은 영옥(英玉)이시고 훈련원주부이시며 아버님 이름은 운산(雲山) 이시니 성균관진사를 지 내셨다 어머 님은 광산김씨시며 이조참의 치덕의 따님이시다. 삼가 집안가승을 살펴본 즉 공께서는 1572년 임진왜란 때 감관선무원종공신에 오르시고 1605년 선조 38년(Z,C)에 도승지 신흠이 벼슬이 기록된 록권을 주니 증직하여 통정대부 갑산부사 를 받으셨다 슬프다 임진년과 을사년 사이는 14년이 지났는데 공은 당시 전쟁하는 사이 국가를 위하여 노심초사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 공훈과 높은 업적은 후세에 길이 남을 것이고 조정 에서 국론으로 선무원종공신이란 은전과 영화가 공께서 돌아가신 후 받 게 된 것이다. 아! 슬프도다. 공께서 세우신 공훈과 충은 썩지 않고 오랜 뒤에도 빛날 것 이 다, 그 어려운 임진왜란 속에서도 공의 충성된 마음으로 마침내 군대의 운량대업을 완수하 였으니 이는 나라의 큰 운이요 후손들에게는 사모하고 동경하는 표본이니 그 누가 공경하 고 우러러 찬송하지 않으랴 공께서는 두 아드님 이 계셨는데 집에서는 항상 가르쳐 주시 기 를 집안의 한때 영달로서 어찌 가히 여러 자손들이 번성하는데 비교할 수 있겠느냐. 우리 집 이 동쪽으로 낙향한지 벌써 6세(世)가 되도록 외로움이 이 같으니 선대를 이어 후세대에 이르러 어찌 중대치 아니하랴. 너희들은 마땅히 덕을 닦는데 힘을 써 많은 복을 받는 것 이 나의 뜻이다. 공께서는 1않6년 명종원년 병오 2월 10일에 출생하시고 1599년 선조 32년 기해년에 별세하시었다. 그 장례에 이르러 두 아드님께서 지관을 초빙하여 장지를 택함에 있어 두 아드님 이 지관을 찾아가 번갈아 등에 업어서 강 건너 단지미고개에 이르자 지관 이 앉으라고 하여 멀리 바라보고 말하기를 저기 보이는 산맥이 심상치 않은 자리다. 바로 쓰면 3대 정승이 나올 것 이 고 가로 쓰면 (횡장) 백자천손이 날 자리라 하니 상주 두 분은 아버 님의 가르치심을 잊지 않고 횡장으로 모시었다. 공의 배위 증 숙부인 온양정씨는 오른 쪽에 합묘를 하고 또 한 배위는 증 숙부인 나주박씨신데 산소는 왼쪽 옆 산, 막은 고개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