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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編 순국열사 및 독립운동가 • 19 2. 3충선의 공적 과 유고 가. 조병세[趙秉世] 1827{순조 27)-1905. (1) 공적 (한말의 문신·순국열사). 본관은 양주(楊州) 지-는 치현(樞顯) 호는 산재(山顆) 이-버지는 홍천현감 유순(꺼핸)이다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급제, 사관(史官)이 되어 1864년(고종 1) 실록청 도청낭청(컴1)廳、 DI5廳)으로서 〈철종실록〉 의 편친-에 참여 했다. 1874년 함경도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이 되 고 이듬해 호조참판에 임명되고 동지사은부사(쪽至짧恩副셋)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히­ 성부좌윤을 거쳐 승지로 임명되었으며 이 어 의주부윤 다시 대시-헌을 지냈다 1887년 공조 판서를 거쳐 1889년 우의정 에 오르고 1893년 2월 좌의정 이 되었으나 이후 정치적 1펀동이 크게 일어나자 잠시 정계를 떠나 가평에 은퇴했다. 1896년에는 총호사(憶떻使)가 되었고 민 비 국장 때 만장제술관(폐章製述官)으로 참여했으며 뒤에 다시 원로대신으로서 중추원의장 과 의정부의정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으로 활동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기 위히-여 79세의 노구(老船)를 이끌고 싱경히­ 여, 을사5적의 처형을 주청(奏請)하려고 했으나 처음부터 일본군의 방해로 고종과의 면담 이 거절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1월 26일 심싱-훈(沈相薰) . 민영환(閔泳煥) . 이 근명(李根 命) 등과 함께 백관(8官)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 와 5적을 처형하고 새 로 충량(忠良)한 사람을 뽑아서 외부대신에 임명하고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5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했 다 또한 일본공사 하야시 [林權때] 및 5개국 공사에게 각각 글을 보내어 독립과 영토보조 의 원조를 요청하고 조약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각국 공사들은 아무 반응을 보이 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종도 듣지 않고 다만 물러가라고 하자 다시 대한문(大韓門) 앞 에서 고종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궁중을 물러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거적을 깔고 계속해서 4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 일본헌병에 강제연행되었다 이후 민영환이 대신 소두(流碩) 가 되었으나 민영환도 잡혀 평리원(平理|잖)에 연금되었다가 특명으로 풀려난 뒤 비분A 참지 못해 29일 자결했다. 기-평 향제 (쩨第)에 강제 추방되었으나 30일 다시 서울로 돌이-와 표훈원(表勳院)에서 여러 사람과 다시 상소했다. 또다시 일본군이 가마애 태워서 강제 추 방하자 가마 안에서 음독히여 조카 민희(民照)의 집에 딩-도히-여 죽었다. 이때 각국 공사관 에 독립 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도록 요청하는 투서와 함께 국민들에게는 충의 로서 독립의 기초를 다질 것을 촉구하는 유서 를 남겼다. 시호는 충정(밑、正)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 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