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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編 각 문중 비문 모음 • 181 신서(辛다)에 현륭원(顯隆園)[참봉]에서 벼슬을 시작하였다. 사과(司果)에 올랐고 전설사(싸 設| 니), 호조(戶펠) , 영희전(永福歐) , 돈녕부(軟寧府) , 종묘(宗웹)를 거쳤으며 영동현김-(永同縣 댐5)으로 나갔으나 부모님을 봉양하는 데 불편하여 곧 돌아왔다. 헌종(원宗) 무술(여成)에 호조정 랑(戶뽑正郞)이 되 었고 양성현감(陽城縣藍)으로 나갔다가 판서가 주청 하여 고양군수 (1혀써킴15守)가 되었는데 사안 때문에 박탈당했다. 대신(太|효)의 청으로 관직에 돌아외-서 공 주목사(公州收使) , 울산부사(평山府使) , 충주목사(펌州收使) 등 다섯 치-례 관직 이 바뀌었는 데 모두 계청(땀請)하여 발탁된 것이었다 갑진(甲辰)에 증광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준직 u뿔 ~(~)에 등용되 어 통정 대부(通政太夫)에 올랐다 성상(聖」二:칠종) 계축(쫓표)에 세폐사(歲縣使) 부사(副使)가 되었으며 인하여 가선대부(흙善大夫)에 올랐다 무오(따午)에 독옥책관(펀玉)ll} 띤’)에 서용되어 가의대부(흙義太夫)에 올랐으며, 경신(康니J)에 시종으로 천거되었고 임금의 은혜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이 조참판, 병조참판, 형조판서, 예조판서, 한성부 판 윤, 돈녕도정, 동부가 되었으며, 좌승지, 사간원 대사간, 사한부 대사헌, 국자감장, 경연춘추 관의금지사(經鐘春秋節義禁知팎) , 동지성 균(同知成均), 동지총관(同知않쉽;) , 승문원 도 · 부 제조, 특진관에 이르렀고 안동부사가 되었다가 기 로소(暑老所)에 들어갔다 전후에 전형을 답-딩-하는 관직에 있을 적에 족인(族人)을 가까이 하는 폐단이 오래되었다. 장관이 인맥에 치우치 게 사람을 뽑는 것을 다투었고 생원 · 진사 선발을 주관할 때는 세력가의 입김이 행 해지지 않도록 했다. 이 때문에 관직을 잃어버 렸지만 또한 후회가 없었다. 첫 부인은 증정 부인(順貞夫)\.) 창녕 조씨(팀寧펌Jlj)로 참판 윤수(允途)와 동복 오씨( I혀꽤吳民)의 따님이다. 계축(쫓표)에 태어났으며 깊이 부모를 사랑하였고 어버이 상에 거의 멸성(滅性: 부모의 상 중에 생명을 돌보지 않고 애통하는 것)하였다. 시아버지 상에 병으로 죽었으니 곧 무자(成 子) 10월 18일이었다. 아들 근필(根耐)은 지금 승지 이며 부인은 풍산부사(뿔山府使) 홍석모 (판錫떻)의 따님이다 딸은 피평(城平) 윤긍규(尹統圭) 진사와 혼인하여 자손 둘을 두었다 정로(政쩔)는 승지 나주(羅州) 박홍양(朴弘陽)의 딸과 혼인하였고 무로(표챔)는 군수 동래 (싸짜) 정헌조(鄭않폐)의 딸과 혼인하였다 손녀는 창녕(띔寧) 조경승(택앓承)과 혼인하였고 외손지는 윤홍진(尹패鎭)이다. 외손녀 둘은 각각 한명교(韓!껴敎), 정인건(짧1I寅健)과 혼인하 였다. 두 번째 부인은 정부인(영夫人) 전주 이씨 (全州李民)로 학생(學生) 지숙(址輔)과 고령 신씨(高靈뎌]民)의 따님이다. 기사(己E,)에 태어났으며 슬하에 자식을 낳았지만 모두 죽었 다 조부인(曺夫人)은 북부 성산리(城山별) , 조고(祖考) 묘 계좌(쫓坐) 앞에 징-사지냈고, 선 고(先考) 묘는 서쪽에 있으니 또한 이 늙은이의 수장(壽藏: 생전에 만들어 놓은 무덤)이다 일당삼실(一堂三室)의 제도를 만들기를 명하고 이어서 돌을 세워 식별하고 또한 여기에서 고치지 않는다. 옛날 현인이 스스로 묘도문자를 지은 것은 세상 사람들이 아첨하는 것을 부끄러 이 여 겼기 때문이다. 그러 나 지금 이 늙은이는 효성 이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데 부 족했으며 충성은 임금을 바르게 하는 데 부족했다 학문은 자기의 인격을 이루는 데에 부 족했으며, 정치는 남을 다스리는 데에 부족했다. 덕은 후손을 넉넉히 하기에 부족했으며, 지위는 세상에 드러내기에 부족했다. 언행은 삼가하였으나 혹 졸렬함에 가까웠고, 분별하 고 생각하는 것은 침착하였으나 혹 느슨함에 가까웠다. 의복과 음식은 검소했으나 혹 인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