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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編 각 문중 비문 모음 • 175 고 들이는데 폐를 주리요 하니 이 로써 서로 다투고 마찰힘이 없어지는데 성공히-였다 갑신년에 이!樞(중추) 經짧(경연) , 義禁(의금) , 課j흘(간장) , 兵햄(벙조) , 禮띤參判(예조참판), 행j흘(간징-), 經鐘(경연) 都承틈(도승지)에 제수되고, 정해년에 쩔宗(익 종)代理(대리 ), 대사헌, 간장, 의금에 제수되고, 무자년에 文科(문과) 覆試科(복시과)에 오르시었다 해 6월 13일에 부친이 병환이 악화되어 상사를 딩하니 향년 71세였다.9월 4일에 북부 성산리 光찮(선영)의 우측 조부묘의 좌측 쫓坐(계좌)에 장사를 지냈다 염습에 비단을 쓰지 않고 전을 드리는 데 기름을 안 쓰고, 모든 懷찌(의물)을 절약하고 검소하게 하니, 이런 것 이 다 선인의 유지라고 하였다 공이 모발과 수식을 간절히 하고, 眉퇴 (미목)에 화기가 넘치나, 사치하는 뜻이 용모에 없 었다 공이 젊었을 때부터 선배들이 나라의 큰 그릇이라고 하였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어 려운 사람을 정성으로 도와주고 어린 아이와 과부를 도와주어서 자기 집 일 같이 하였다. 자기 의 환갑날에는 잔치의 배설을 못하게 하고, 깨1괜(중모)가 연로에 가난하였으므로, 친L 처럼 공경 하였다. 제부가 일직 작고하였으므로, 어 린 조카를 길러서 교육하여 성취하도록 하였다. 조상을 받들어서 묘역의 석물을 갖추고, 종손이 힘이 부족한 것을 도와서 성공하 도록 하였다. 외가를 도와서 쫓田(제전)을 작만 하여 香火(향화)를 이어가도록 하였다. 기 름진 음식을 먹지 않고 마구간에 살젠 말이 없고, 거처와 기물이 검소하여 희미한 창 안에 짚 방석으로 가난한 선비생활을 하였다 나라의 역사를 탐구하고 세족의 원류와 어진이의 언행을 탐구 통달하였다 가문의 역시-는 빛났고 관리생활에서 왕에 게 꽃l햄(품계)한 것이 대체로 정직하였다 정치가 바르고 밝을 때에 신임이 두터워서 황최~~(위무)의 권위도 있었다. 순조가 |폐位(사위)할 때에 親近(친근)의 수장으 로서 면밀히 상고하기를 100여 회, 연석에 오르기를 500여 회, 왕께서 相願(상고)할 때에 안부 를 물어보기도 하고, 강의를 할 때에는 다시 불러서 취지와 내용을 물어보기도 하고, 술잔을 내려서 격려하는 등 하였다 글 뜻을 상세히 분석하여 간절히 힘써서 설명하여 功(공)을 이루었다 하늘의 뜻에 밝아 서 강연을 하고 上告(상고)를 하므로, 다 받아들여 졌다 공은, 먼저 관리생활이 아름답게 지속되기를 비-라고, 새로운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옛 성현의 일을 들어, 지극히 청 백함을 밝게 함을 아뢰었다. 핸(연)나라 여행을 명령받고 갔다 가 돌아오는데, 다른 일에 눈뜨지 않고, 일점의 의혹이 없었다 집안에 어질지 않은 잡된 사람의 방문이 없고, 오직 니라에서 부를 때에만 문을 나섰다 오직 주야로 공순힘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비록 세상에 거친 일이 있어도 거기에 구애받 지 않고 매양 합당한 사리와 변론을 굳게 하니, 시-람들이 그를 넉넉하게 대접하였다 내실 을 강화하여 경복케 하였다 간혹 편협한 자가 비방을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안온하게 맑 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았다 산림과 전야에 묻혀서 상소가 관철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순임금 같은 밝은 정계를 떠나기가 어려웠으나, 마침내 사퇴하고 돌아와서 따로 일거 리 를 갖지 않았다. 오직 정서와 역사를 천 번이라도 읽고, 화려하지 않고 사리에 통달하여 꽉文(서문)에 심취하여 딩나라 시와 서예의 열증하여 캔합(율시)에 조예가 깊어 졌다. 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