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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 가평의 얼과 인맥 피를 내어 받드는 정성을 다하였다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육식을 삼가고 종친과 외가 의 묘역도 관리하여 향사를 받들도록 하고 산업을 경영하는데 자기의 봉급을 덜어서 도오타 었다. 죄인 박하원(朴夏源)이 사변(麻免) 되었는데 공(公)을 빅-하원(朴夏源)과 연루성을 제기 하는 자가 있는 것을 규명하여 배척하였다. 신정 (c미댐)이 허위로 조정에 불리한 일이 있을 것 이라고 유포하였으므로 이를 태위(太位)로 하여금 처벌케 하였다. 공이 안으로는 성인(聖人)의 학문과 경서(經똘)와 역사(歷史)의 지식을 넓히고 현재를 견주어 살피었다 왕명을 받들어 전 후 천4백여 개의 일을 맡아 공을 세웠다. 은혜로운 공명으로 특례로써 반궁을 지키는 일도 여 러 번 있었다. 집에 들어서 어머니의 건강을 지성으로 살피니 원근이 신뢰하여 오래도록 서 서 강연을 듣는데도 평온하여 미-음이 간략해졌다. 예도가 묵중하고 응답이 선명하였다. 순묘 (純템)의 친신(親닮)으로서 처사가 관대하고 친밀하여 사람을 접하는데 징-중히면서도 온화하 였고 의식을 사치하지 아니 하여 한사(寒士)의 풍모였다. 스스로 근신하여 잡인을 접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지 아니 하였다. 공사에 밝고 청탁의 능히 적응하였다. 글자가 실타래처럼 흘러나오고 필력 이 비등하여 옛날 미통 (米뚫) 같은 명필의 풍조였다. 삼대(三代)의 조정을 섬긴 54년 족적을 남기려 하지 않고 평 상으로 돌아와서 노령으로 사임을 고하니, 이 때에 세자(世子)가 대청(代總)을 하는 때이라 정업(正業)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아는 이는 이-쉬워 하였다. 학술은 이기(핍氣)를 연구하였 고 시(함)는 사육(四六)으로 정자(程子)의 학문을 배우려 하였다. 포헌집(案빡集) 약간이 있 어서 자취를 남기었다 정부인(貞夫人) 청송(춤松)심 씨(沈많)는 이조참판을 증직 받은 상현 (商賢)의 딸이요, 부사(府使)로 이조참판이 증직된 해(濟)의 손녀요, 진사로 이조참의에 증 직된 후준(J훔浚)의 증손녀이요 참판 평(杯)의 현손이요, 현감 나주(羅州) 박공(朴公) 선원 (善‘파)의 외손녀이다. 을해 (6~)년 6월 9일에 출생 17세에 출가히-여 을미 (6未)년 9월 5 이에 생을 마치니 헝:년 81년 동지 딜-에 부군의 묘에 합묘하였다. 딸로서, 부인으로서, 어머 니로서 덕의를 갖추었고 아우가 두 사람의 조카를 극진히 사랑하고 외로운 과택도 도와서 잠업과 방직을 손수하고 80 노인이 되도록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스스로 군자(君子)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해로하고 관직에 있는 동안 서로 존경하고 범인의 부부 사랑은 초월하였다. 장남은 충주목사 현서(玄縮1)이며 자부는 창녕 조씨 윤수(允途)의 딸이요 계부는 완산 이씨, 장남 현서(玄縮)의 아들은 근필(根耐) , 딸은 진사 파평 윤긍규(尹就圭)의 아내, 계부 의 출생은 아직 어리고, 장손 근필(根폐)은 어리고 윤긍규(尹찌조)의 두 딸은 증손이다. 희 (1鳳: 탄식한다)라, 선친을 위하여 쓰는 글이 순서가 있고 규범이 있어이: 하는데 내가 이 렇 게 간략하게 기술하여 질적으로 선친의 높은 업적을 다 나타내지 못하였다. 또한 화려하게 장식을 하는 것 보다는 이것이 선친의 검소를 주로 하신 의리와 덕행에 부합되는 일이리 라 불초 아들 현서 (玄總) 그유히 고하고 울면서 기 술함 손자 근펼(根폐) 돌에 올리어 쓰는데 모시었음 당우 8년 숭정(몇祝)4녀 임 인(포寅)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