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page

第二編 서원 · 제단 · 기녕관 • 139 정계복귀요청을 끝내 거 절하며 “나는 이 난국을 감당할 능력 이 없으므로 연부(年t좁)역강 ()J彈)한 후배들에게 나라 일을 부탁한다"는 말씀을 남기고 초야에 묻혀서도 노심초사(勞 心얹恩) 민주회복을 염원하다가 평화적 정권교체를 보지 못하고 1976년 4월 25일 향년(~ 年) 66새를 1기로 선향(仙~I))에 드시었다. 장의(罪懷)는 고인의 유맹(펴命)에 따라 가족장으 로 모시었으나, 선생의 고매(高週)한 인품을 흠모하고 애도하는 걱-계의 성정(誠情)으로 사 회장에 예우(禮웹)하였다 이 처럼 선생은 일제의 식민치하에서는 국권회복을 기망하였고 조국이 광복되자 주권국 가의 정치발전을 도모하였으나 공산남침의 6 . 25 전쟁과 자유당독재에 항거한 4 .19학생 의거, 5 . 16군사 쿠데타 등의 격변과 민주화 투쟁의 소용돌이를 거치는 오랜 정치역정에서 도 정계 의 의연(殺然)한 지도자로서 권모를 멀리 하였고 나보다는 동지와 후배들을, 소수 보다는 대중을 타협에는 공리(公利)와 명분( 1-"1分)의 원칙을 주장관철하면서 명리(名利)에 집칙-(행흙)함이 없이 오로지 굳은 신념으로 진퇴를 분명히 하며 조변석개(朝變?改)하는 호돈(混핸)에도 대인(對人)함에 항상 화기와 신뢰를 불러일으키고 대의를 위하여서는 소아 - 희생하는 정치도의의 산 교훈을 남기었디. 선생은 순후(淳맘)겸서(誠평、)하고 성품이 순화(純和)하여 표리(表뿔)가 같으니 우러러보 면 현덕(賢德)군자(君子)임을 알 수가 있다. 형제(兄弟)우애(友愛)하고 가도(家道)에 법도 <1.t많)가 있어 집안이 평온(平溫)화목(和陸)하였고 사람을 도움에 남모르게 덕을 베풀어 은 의(!댄、義)를 보이지 않았으며 빈곤(負困)하여도 내색( I셔띤)함이 없었으니 이는 선생의 소양 으로 세인이 다 아는 바로서 과언이 아니다 깊은 도량(度量)과 굳은 마음을 지녀서 입각 (入때)하여서도 기쁨을 보이 지 않았고 6선의 의원직을 물러나도 거리낌 이 없으니 뒤우치지 않았으며 의 외의 훼방(짧듬혔)을 당하였어도 능히 용서 하였다. 감정을 굽혀 명 예를 구하지 않으니 통달(通達)한 사람이 보면 강개(剛介)하다 할 것이오 강개(剛介)한 사람이 보면 통 딜~(通達)하다 할 것인 즉 우연선생은 선현(先賢)의 말씀대로 인 · 의 · 예 · 지 · 신 오상(五 常)의 모표(模表)로 정치사회의 살아있는 양심(良心)이오 신문의 사설적(社說的) 존재로 중 용(中댐)의 의훈(짧회11)을 남기신 분이 다 이와 같이 선생의 높은 기상과 정치철학을 경모히-고 의행(認行)을 기리고자 선생을 따 -던 후학들이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해마다 기일(료、 FI)이면 선생 묘전(幕前)에 모여 추모 의 정을 나누기 4반세기에 국민정부의 배려와 후인의 구재 (J샘付)로 북한강이 굽어보이τ 이 곳 우탄산 기숨 선생묘하에 조출하게 기념관을 건립하고 개관에 때맞추어 이글을 남기 는 뜻은 선생의 유훈(遺뢰11)을 받들고 덕업(德業)을 현양(顯楊)하며 더욱 후인이 기리 배우 고 거울삼고지- 함에서 이 다. 삼가 우연선생 영령(핏짧)의 명복(;파祝)을 비 오니 영안(永安) 하옵소서. 서기2어0년 4월 25일 後텔-1司 ffIi團합人 ]二페| 판짧杓 先生 등니;쉽; lji菜쩍 듬파댄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