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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 가평의 일과 인맥 때, 저 거룩한 신종(페宗)황제(皇帝)는 즉시 천지의 대명을 받들고 인류의 열망에 따라 전 후 잃6,700여의 대군을 출동하여 저것을 정토(狂討)한지 7년 만에 이 강산을 깨끗이 수복 하였으니 참으로 그 은공은 이 땅의 초목도 잊을 수가 없는 것 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에 우리를 구원하다가 국력이 피폐하여진 l께니-라는 왜란 종식 후 20년 만에 북로(北짧)가 발호(댔휩)하니 의종(鐵宗)황제(皇팎)는 조선과 연합군으로 만청(패淸)을 정벌하려 하였는 바, 그때 폐주(廢主) 광해(光海)는 거국(學國)진공(進攻)하여 전날의 은공 을 갚고 뒷날의 근심을 없애버리는 영단을 세우지 못하고 도리어 은혜를 원수로 갚아 강 홍립(姜弘立)에게 2만 병력을 주어 보내면서 배빈-을 교사(敎浚)하여 마침내 배신 투항하고 말았으니, 만일 그때 함께 간 김응하(金應河) 장군과 그 휘하에 3,000 장병의 분격 전사가 없었더라면, 이 민족이 어떻게 하늘을 쳐다 볼 수 있었겠는가! 이로 비 롯하여 벙자년에 북로(北處)가 불의하게 침입하여 삼전도(三田波)에서 고금에 없 는 성하의 명을 강요하였으니 이는 일찍이 5.000년의 문화역사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입 히고 이어 중원으로 달려들어 명(明)나라를 멸망시켰으니 숭정(쌓패) 17년 갑신년(l없4년) 3월 19일 의종(鐵宗)황제(皇帝)는 황후와 함께 자액(自縮)순국(쩌國)하였다 이에 우리 민족은 은밀히 복수(復雄)설치(雪따) 멸청복명(滅淸復l꺼)의 북벌(北{:Jt)대계를 세웠으나, 효종대왕은 왕자의 신분으로 인질로 잡혀 심양에 가서도 앞으로 명 (1꺼)나라 유 민 중 9명의 의사를 물색하여 10년 뒤에 대동 환국하였으니 이는 앞으로 북벌(北{j(:)하는 날에 향도관을 삼으려 함이 었다 효종대왕이 왕위에 등극한 다음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과 이완(李洗)대장을 주축으로 북 벌밀계를 추진하던 중 애석하게도 효종 10년(1659년)에 대왕이 갑자기 승하하시고 만청(滿 淸)이 눈치를 채어 감시가 더욱 심한지라 대 계의 준비가 늦추어지고 말았다. 그러 나 우암 선생은 복수 설치의 대 엽과 멸청북명(滅淸‘復|띠)의 대사는 청나라가 멀리 물 러가지 않는 한, 또 우리 겨레가 서너 집 이 라도 살아있는 한, 절대로 그만둘 수 없는 것임 을 밝혀 임금에게 알리고 사우(士友)에게 깨우쳐서 청나라와 무역을 반대하고 이 천지가 대명(大明)의 천지임을 굽이굽이 표시하여 우리나라 6천리 강토에는 아직 인류문화가 남아 있음을 길이 흘러서 왜제(優帝) 강점(彈리) 시에는 항일 독립정신으로 승화하였고 을유 광 복 후에는 인류문화 건설의 저력으로 계승하였으니, 마침내 조종암은 復歸(복수)雪따(설치) 하는 민족정기의 웅결이요 대통행묘는 尊_E않廢(존왕천폐)하는 춘추대 의의 싱-정 이 디- 2. 명나라 연호 사용 병자호란 후에는 청국에 항복한 조건에 따라 의당 청국연호를 쓰기로 맹서한 바 있으니­ 청국에 보내는 문서에는 부득이 청국 연호를 쓰고 국내문서, 비문(牌文), 등에는 물론 족보 (族댐) 등에도 국기-니- 민간이 다같이 명 나라 끝의 연호인 숭정(뿔祖)을 쓰고 비문 맨 위에 다 『유명조선(춰ï께朝,따)J 이라고 쓰는 것 이 상례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