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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編 서 원 · 제 단 · 기 념 관 • 129 2. 중국 측 인사 가. 왕미승(王美承) 동창 왕상생(東昌 王l훌生) (파)(이름)은 미승(美承)이요 자(字)는 계백o이니 1602년 5월 19일 산동성 동칭-부(山싸씬 싸μ부)에서 났다. 공은 천성이 본래 강개하고 남의 급한 일 구하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다 그 덕 의에 감복하였다. 공이 43세 되던 해 (1없4년)여름에 이지-성(李 I~I成)의 난(亂)이 있 음을 들고 지방 사람들에게 『우리 명나라 신자 된 지-로서 화변이 이에 이르렀는데 어찌 가만히 앉아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국가를 위하여 나가 싸우자』 고 의병을 소집하여 쫓기 르 원하는 자 천여 명을 데리고 낮에는 은신하고 밤에는 걸어 장차 적과 싸우려고 할 제, 유적(流減)이 횡행하고 더욱 기근(戰웰)이 심하여 군중(單'i=')에 양식이 떨어짐 에 총병(總 깐) 오삼계가 관문을 열어 청병(淸兵)을 불러드리는지라 별반 싸워보지도 못하고 적에 잡 혀 심잉:관에 송치되었다. 나. 임구 풍상생(臨뼈 ;馬l좋生) 휘는 심-사(三什) 자는 유영(,야榮)이 니 서기 1607년 1월 18일 산동성 청주부 임구현 부정 리에서 났다 그 부친은 벙부시랑(兵部샘겁1)) 도찰원(컴I~察院) 부도어사(副휴1)個]使) 휘(댄) 수(秀)이 고, 모 친은 호부(戶部)싱-서(尙먹) 포주(浦洲) 양준민(싸俊야)의 따님 이다 ... 중략 ... 공은 어 렀을 때부터 천성 이 공손하고 검소하여 의(義)0를 좋아하셨다. 명나라 저1116대 희 종(흰;宗)철황제(렉띈땀)천계CR.햄)(1621-27)이 래 위충현(짧암、賢)이 조정에서 집권하면서부터 기강이 점점 해이히-여김-에 공은 벼슬을 아니 히-시고 고향에서 사셨다. 공이 30세 되던 해 (1않6년)에는 산동성에 큰 흉년이 들어 굶는 사람이 많음에 논밭과 가장집물까지 팔아 양독A 사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제하니 그 지방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공이 32세 되던 해(1않8년) 11월 청병(淸兵)이 산동에 침입하여 포정사(布政바) 정-뱅문(張秉文)이 전사하니 공은 부인과 가족을 장산도(톨山‘|옮)에 피란케 하고 하계선(원繼光)괴- 합력하여 그 지방 청년들에게 『우리 τ 대대로 니-라의 은혜를 입어 옹 국민으로서 이 러한 때에 옴을 바치 나라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 . .JJ 고 호유하여 의병을 소집하여 덕주(德、州)를 궁게 지키니 적 이 감히 진격치 못하였다 그 다음해(1639년) 淸兵이 무성(武城)을 포위한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인솔하고 구원하러 가니, 미처 닿기 전에 지현(知縣) 이승방(쭈jJ\)J)이 전사하고 군민(單民)이 흩어져 달아나는지라 급 히 공격함에 청벙 이 성을 버리고 도망쳐 공은 하계선과 호(爆)를 성 주위에 피-고 제방을 구 축하여 남천(南) 11)의 물을 들이대니 적 이 침입치 못하였다 그러던 중 총병 부우명(패)z.1펴)이 위현(威縣) 박주(操州)등에 격문u激文)을 놓아 구원으 청하니 공이 또한 가서 응원하였다. 그때 에 군량이 다 없어져 북창의 군량을 갖다가 먹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