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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 가평의 얼과 인맥 는 이유로 김백선을 군율에 따라 처형했다. 이 사건은 그의 강직한 성품의 일면을 보여주 는 것 이지만 김백선의 죽음으로 말미 암아 의병 대중의 사기가 떨어 졌으며, 이듬해 5월 장 기렴(禮基減)이 거느린 정부군에 의해 패배하게 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화승 총(火鋼統)으로 무장한 의병으로서는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나 관군에 대항하기 어려 웠다. 제천에서의 패배 후 단양으로 일시 퇴거했다가 다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평안도로 북상했고, 청나라의 원조를 받기 위해 다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이동한 뒤 오퉁[滾東] 지 방으로 옮겼다. 그러나 선발대로 보낸 이범직(李範授)이 중국 관헌에게 무기를 빼앗기고 부하 20명과 함께 피살되자, 자신을 따르던 219명의 의병을 해산시켜 귀향하게 한 후 퉁화 현[通化縣]에 정착하여 재기의 기회를 엿보았다. 1898년(광무 2) 고종의 소환으로 일시 귀 국했다가, 이듬해 다시 랴오퉁으로 들어가 1900년 다시 귀국할 때까지 랴오퉁에서 강학(講 學)과 저술에 전념했다 귀국 후 황해도 평산과 평안도 태천 · 개천 · 용천 등지 에서 문인들 을 가르쳤다. 1904년 8월 〈칠실분담 溶室慣 -談〉 을 저술한 뒤 배성일전(背城一戰)을 내세 워 깊고 넓은 타국으로 떠나 거국수의(去國守義)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진회(­ 進會)에 대항하여 충청도 · 황해도 · 평안도 등지를 돌아다니 며 향약을 조직하고 그 시행을 권장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 유림들에게 의 병의 궐기는 못할지라도 의토 (義討) . 언토(言討)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이 강제 체결되고 군대 해산이 이루어지자 전국민의 조직적인 성토대회로 적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국내의 의병운동은 외국으로부터 원조가 없는 한 실패할 것 이라고 생각하여 국외인 노령에 항구 적인 항쟁의 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곳에서 이 범윤(李院允) . 이 남기(李南基) . 이상설(李相힘) 등의 추대를 받아 13도의군도총재가 되었다 이 때 13도 대 소동포(大小同뼈)에 게 통고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국민의 단결과 결사 보국을 역설했다. 1910년 한일합병 이 체결되자 전국에 있는 지사(志士)들에게 간도로 나와 함께 수절(守節) 하자고 호소했다. 1915년 관덴 현[寬倒縣] 방취구(芳짧濟)에서 일생을 마쳤다. [사상과 역할] 그는 척사론을 기본으로 하여 서양사싱-에 철저히 반대히면서 유교적인 이념으로써 통치되 는 독립된 나라를 구상했으며 국제질서도 중국 중심으로 다시 개편할 것을 주장했다(→ 위정 척사론) 특히 서양사상의 주체가 되는 평등 자유론, 공화제 또는 입헌군주제의 민주주의 체 제, 그 첨병으로서의 기독교·신학문이 구래 유교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사농 공상병(士農工商兵)의 오민(五民)으로 체계화된 귀천존비의 사회질서가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향약을 실시함으로써 농민반란을 방지하고 제국주의 침략에 무력으로 항쟁할 수 있다고 생각 했다. 그의 독립운동방략은 의병전쟁의 지도이념으로 기능했고 비록 유교사회를 재건한다는 복고적인 것이었으나 그의 영향 하에 있었던 제자들이 비타협적 민족주의로 이어져 독립운동 전선을 향해 나아가는 기틀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