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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 가평의 얼과 인맥 나라의 왕으로부터 총병(뺑、兵) 벼슬을 받았다 1634년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에 임명되었 으며, 중국무역과 둔전(면田) 개설의 공로로 이듬해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무역거 래에서 폭리를 취했다는 탄핵으로 한때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하여 압록강 맞은편의 송골 산(松山) .봉황산(때凰山)에 봉화대를 설치하는 등 국경경비를 강화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백마산성에서 청군을 차단하고자 했으나, 청군이 우회하여 남하했으므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듬해 인조로부터 굴욕적인 강화를 받아내고 돌아가던 일부 청군을 쳐서 무찔렀다 1637년 청나라가 가도(島)에 주둔한 명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병력을 요 청하자 수군장(水軍將)으로 출전했으나, 병자호란 때의 치욕을 씻을 기회를 노리던 그는 명의 심세괴(沈世船)에게 연락하여 몰래 명군을 도왔다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안주 목사가 되었으며, 1640년 디-시 청나라의 요청으로 주사상장(빠師上將)으로 발탁되어 금주 위(鎬1'1'1衛)의 명군을 공격했지만 이때도 마찬가지로 승려 독보(獨步)를 보내 명군과 연락 을 취하면서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1641년 서울로 돌아왔으니 , 그의 행적에 의심을 품고 있던 청의 압력으로 벼슬에서 쫓겨났다가 곧 행동지중추부사(行|司知中樞府꿇)로 복귀했다. 그러나 1642년 명장(明將) 홍승주(洪承時)가 청 나라에 투항함으로써 명과의 관계가 발각됨 에 따라 체포되었다. 청나라로 압송되던 도중에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金솟I~繹)에서 탈출, 회 암사(橋熾꼼)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기- 1643년 명나라에 망명했다. 그뒤 명나라 장군 마등고(馬驗高)와 함께 석성(~닥城)에서 청나라 공격에 나섰으나 마등고가 곧 항복하여 뜻 을 이루지 못하고 탈출을 기도하다가 그의 부하였던 한사립(韓土立)의 밀고로 잡혀 1645년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이무렵 조선에서 심기원(沈器遠)의 옥사가 일어나 그의 관련설이 대두되자 1646년 인조의 요청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역모사실을 부인했으나, 김자점(金되 點). 원두표(元斗杓)가 강력히 처벌을 주장, 심문을 받던 중 형리(폐更)에게 장살(柱殺)되었 다 사후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임경업전 林慶業傳C) 을 비롯하여 많은 소설 · 설화가 전해지고,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신격화되었다 1697년(숙종 23) 복관되었다. 충주 충렬사(忠 烈洞), 선천 충민사(忠廳洞)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感)이다. 사. 이 완(李 훌) : 1579(선조 12)-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열보(1뾰南). 이순신(李짧-보)의 조카이다 임진왜란 기간에 이순신 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1599년 무과에 급제해 평양중군 등을 거쳐 1623년(인조 1) 충청도병 마절도사가 되었다. 이괄(李造)의 난이 일어나자 이천에서 반란군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그 뒤 의주부윤이 되었는데, 당시 요동도사(避東都司) 모문룡 (毛文龍) 휘하의 명나라 군대가 가도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조선측에 군량을 요구하며 약탈을 자행하자 모문룡의 군사를 곤봉으로 때려 위계 한 급이 강등되었다 1627년 후금의 침략으로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출정했는데 패하자 병기고에 불을 지르고 분사(잦死)했다 1706년(숙종 32) 아산 현충사(顯많페리)에 제향되었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강민(剛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