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page

第二編 서원 · 제단 · 기념관 • 123 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끝까지 척화를 주장했다. 이듬해 인조 가 삼전도(三田波)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청에서 척 회-론자의 처 단을 요구하자 스스 로 척 회-론자로 나서서 윤집(尹集) .홍익한(洪짧漢) 등과 함께 청나라 심양(補|써)으로 끌려갔 다 그곳에서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심양성 서문(jJ~門) 밖에서 처형딩-했다 그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고향에 정문(파|꺼)을 세웠으며, 영의정에 추증했다. 광주(廣州) 현절사(!願節페리) , 평택 포의사(쫓義洞), 홍산 창렬서원(影烈書院) , 고령 운천서원(雲川뿔院), 영주 장암서원(H士냈뿔院) 등에 제향 되 었다. 저서 로는 〈충렬공유고 忠烈公파유.'~> 가 며, <묵매도 뚫梅|폐> 2점 이 전한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마. 金應河(김응하) : 580(선조 13)-1619(광해군 11 ). 조선 중기의 무신 있으 본관은 안동 자는 경의(景義). 1604년(선조 37) 무과에 합격했으나 말직을 전전했다 병 조판서 박승종(*,、承宗)의 주선으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주변의 시기로 파직당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 박승종이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할 때, 다시 비 장(柳將)으로 기용되었 다. 1610년 선전관에 임명된 뒤 경원판관·도총부경력 ·삼수군수·북우후(北與{릿) 등을 지냈다. 1618년 명이 후금(後金)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이듬해 2월 도원수 강홍립(姜 弘立), 부원수 김경서(金景혜)를 따라 좌영 장으로 출정했다 이 해 3월에 부차령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하고 조선의 원군도 후금 군대에 항복했을 때 3.000의 군사로 후금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1620년 명 신종(피Ijl宗)으로부터 요동백(遊東佑1)에 봉해졌다 뒤에 영의정 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바. 임경업(林慶業) : 1594(선조 27)-1646(인조 24). 조선 중기의 무신. 임경업 영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친명반청(웰!꺼反淸)에 투철한 무장으로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활약했으며,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된 이후에도 명나라와 협력하여 청을 공격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다. 본관은 평택(平澤) . 자는 영백(꽃伯), 호는 고송(孤松) . 판서 정(整)의 7대손으로, 아 바지는 황o이다. 1618년(광해군 1이 아우 사업 (m꾀業)과 함께 무과에 급제했다. 1620년 소농 보권관(小農혈碼管)을 지내고, 1622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624년(인조 2) 이팔(李造)의 난 때 정충신(鄭忠信) 밑에서 세운 공으로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뚝) 1등에 봉해지고 가 선대부(흙善大夫)에 올랐다 그 뒤 우림위장(쩌林衛~,영) . 방답첨사( ,껴體했使) . 낙안군수 등 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병사 신경인(마l줬)의 좌영장으로 출전, 강화도 로 갔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된 뒤여서 후금군과의 전투는 없었다. 이듬해 체찰부별장, 1629년 용양위부호군, 1631년 검산산성방어사 · 정주목사 등을 거쳐 1633년 청북벙어사 겸 안변부사에 기용되어 백미-산성(白馬l上1城) . 의주성(義州城)을 수축했다. 같은 해 명나라의 공유덕(孔有德、)이 반란을 일으켜 후금군과 합세하려 하자, 명 군과 함께 이를 토벌하여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