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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編 서원 · 제단 · 기념관 • 117 - - 잠곡(灣참)선생 추모(追幕)비 명(陣銘) (해설) 선생의 성(姓)은 김 (金)이요 휘(證)는 육(:1;휩)이요 지-(字)는 백후( {I~IJ힐)요 호(訓)는 짐곡(뺨 유)이요 시(歸)는 문정(文貞)공(公)이요 그 본관은 청풍(淸j화)이니 이는 문의공(품’文鐵公) 식(많)의 증손(玄孫)야라. 선조(宣祖) 십삼년( 1-二{I=-) 칠월(七셔) 십사일( 1-띄 11)에 한성부(핏 城府)서부(西部)마포리 01꺼때1] 면) 외가댁(外흰)에서 틴-생(誠生)하시니, 때는 명나라와 청나라가 서로 세럭을 다투던 초기(챔角之初)라 동쪽에 있는 우리나라도 역 시 큰 나라의 세력다툼에 피해를 입어(角逢之神) , 큰 나무(혐木) 큰 집(太家) 즉 중국 대륙의 불안(不꽃)상태(狀態)는 말로써 설명하기 어렵고(以 n點說) 이런 시절을 당하여(當於其時) 선생께서 처신하는데(뺑 流) 어렵고 괴로움(困츄)이 얼마나 컸으리요(幾{I얘11폐) , 타고난 재질(天質)이 총명(總明)하고 특달(特達)하사 이미 취학히-자마자 크게 이루시고(많長就學) 높은 스승을 찾아 학업을 닦으 시니(修業於高門) , 기재라 부르고(輪謂奇材) , 후일에 반드시 나라를 위하는 대들보와 초석 이 되 재목이라고 일컬어졌다 (口後 |극必寫國家柱Dι材), 그러나 불행하게도 굉해군(光海람)의 혼란기여서(混I패) , 적토마도 달리지 못하고(폈不써I~), 봉황새도 날개짓을 할 수 없는 시 절 이리-(凰不振짧) 드디어 가평(;!JIJ平) 외서면(外펴때) 짐곡(濟션뿔)에 피신하사(途遊跳子), 두 서 너 칸 초가집(數間草많)에서 독서(讀書)로 소일(때까11)하시니 고(故)로 호(號)를 잠콕(濟유) 이리- 하고, 딩-호를 회정당(빠靜堂)이라 하였다. 인조(仁祖)가 계해(쫓玄)에 반정(反正)한 후, 이년(二年) 갑자(甲子)에 과거에 응시 무과 장원으로 뽑히 니(환科文船) 임금(上)이 어진 자 질을 가춘 인재라는 것을 알고(所知具賢), 진언을 듣고(言聽) 계책을 채용하는 고로(計用故) 군신(컴닮)이 서로 마음이 맞아서(相得) , 통회- 대동법을 (因薦通貨太同法)을 제정하고 국내 에 실시(한流l꿇|內)하니, 이는 임금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두 개의 큰 줄기라(是薦忠띔 愛民之二大根幹也)라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사랑함이 이보다 더 큰 것 이 있으리오(護國(愛 마행太於是), 임금(上)이 특히 현량한 신하를 사랑하여(將愛具賢良), 기로소에 들어오시도로 배려(擺拜領入훨社)하시니라, 효종(孝宗) 구년(jL年) 무술(여방) 구월(fL져) 사일(四 EI)에 서 울 집 에서 돌아가시니(쭈F京邱) 향년(享年) 칠십구세(七十九歲)시니라 양주 치동 금출리 건좌(서북방을 등진 자리) 동남방향의 들(楊洲팎페金서댄乾座앓1페之原)에 장사지내었다. 서 원(,닫院)은 가평 의 잠곡(1二;!Jn平뺨유) , 양근의 미원(楊빼 迷源) 펑펑 의 봉강(淸風 風間)강동의 계몽(江핑 뺨豪), 송도의 숭양(松都 松陽)의 디-섯 곳(五處)에 설치되었고, 서원의 배향(뿔院 配훈)은 조정 의 명령(以l펴令)으로 즉시(딩IJ時)시행()}따Ï)되었고 짐-콕(뺨씀)서원(뿔院)은 선생 (先쿄)이 돌아가신 후(주後) 사십칠년(四十七年) 즉(태)숙종(햄宗) 심-십년(프十年) 갑신(甲 I~)에 선생(先生)의 유품이 있는 곳(以先生짜援之所故)이기 때문애 가평(jJII~P-) 인사(人士)들 이 맑은 덕을 추모(追폈‘淸德)히-고 감히 잊을 수 없어(뿔敢忘乎) 서원을 새로 짓고(j댐建,듀 |첼) , 아울러 제단을 쌓이-(拉置lðGJ::) , 제물을 갖추고(체 l낭Z福) 향불을 피우는(줬必之騎) 의식 (제향을 올림)를 옛 법식에 따라 마친지(完~Il 라法) 심년이 지난 후(越三年)에 액지-를 하사 받이-(맺縮) 오랜 세월동안 제사를 지 내오디-가(永샤致쩔),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로 조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