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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編 서 원 · 제 단 · 기 념 관 • 111 궐 밖에서 큰소리로 통곡하며 하명이 있을 때까지 물러가지 않는다며 길바닥에 누워 經챔 (경 숙)不去(불거)하는 형편에 이르게 되자 임금이 마지못하여 “조광조 등이 어찌 국사를 그르칠 수가 있겠는가? 근래 광조 등이 국사를 일시에 과견 하게 추진함으로써 생긴 일이니 그들을 모두 방변하라” 이리하여 조광조 동을 비 롯한 먼저 들어간 유림들과 박세호를 위시 한 수 백 명의 유생 -이 모두 풀려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이후 성균관을 비 롯한 당시의 유림사회에서는 농담 박세호의 절의에 모두 감복하였다고 이른다. 1528년(며宗23) 당쟁이 조금 누그러들 무렘 그는 띠子試(무자시)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禮팽lE영1)(예조정랑)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숭진을 시기하는 무리들로 인하여 강원도 영월 부사로 축출 당하게 되었는데, 당시 영월부사로 부임하는 이들이 임지 에서 모두 사망하느 이이 자주 발생하여 그를 그곳으로 모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가 영월 임지로 부임하게 되니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이 모두 안타까이 여 겼으나 그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고 이른다 이 당시 친우인 꿇쨌(모재) 金安國(김안국)이 전별을 아쉬워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1)(.星落落親知盡 白髮餘生日狂|西 老去難懷尤不耐 一젊相歡~찜懷懷 새벽별 반짝일 때 친구마저 떠나는데 백발 내 인생 해가 지는구나, 늙어가는 회포 견디기 조차 어려운데 한잔 술 권하는 심사 서글프기 그지없네. 라. 重養(중암) 金平默(김평묵) (국사대사전, 일중당, 1979년 4월 15일 빌-행 310쪽) 1805년(순조5)-1882년(고종19) 이조 말기의 학자. 자는 秘章(치장) , 호는 重輩(중암), 본 관은 淸風(청풍) , 李華탬(이회-서)의 문하에서 수업 , 1821년(순조 21)에 李nSti흉‘(이만손) 둥 만여 명의 f-F::;fß衛正(척사위정)의 상소문을 보고 감탄하여 우리 동인으로 하여금, 천하 후 세에 사과하기에 족하다고 이를 후원하였으며, 후에 j주洋(척양) , 투俊(척 왜)의 院(소)를 초 안한 까닭으로 왕의 노여움을 사고 섬에 유배당했다가 다음 해 8월 헤제되었다. 저서 學統 考(학통고) 海上筆템(해상필어) 투洋大義(척양대의) 핏張|궤答(경장문답) 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