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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 가평의 얼과 인맥 二. 비 석(봉안 신우1) 1. 중앙 가. 靜養(정암) 趙光祖(조광조) - 좌측 (국사대사전, 교육도서, 1989년 5월 20일 발행 1250쪽) 1뼈2년(성종13)-1519년(중종 14)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 · 문신, 자는 孝直(효직), 호는 靜 꿇(정임-), 본관은 한양, 감찰 元網(원강)의 이-들, 김굉필에 수학하였다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 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1515년 문과에 급제하여 典籍(전적) . 藍察(감찰) 을 역임하여 왕의 신임을 얻었고, 입시할 때마다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왕도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至治主義(지치주의)를 역설하였다. 이 해 표言(정언)으로서 *'、램(빅­ 상) 등이 앞서 폐위된 順B:;(신씨)의 복위를 상소하다가 대사간 李쯤(이행)의 탄핵으로 유배되 자, 상소지를 벌함은 言路(언로)를 막는 결과가 되어,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다고 주장하여, 오 히 려 전츄(이행)을 파직케 함으로써 왕의 신임을 다시 인증 받았다 그 후 修擺(수찬)에 이어 호조 · 예조의 正郞(정랑)을 거쳐, 校理(교리)로 經錯(경연)셈讀官(시독관) . 春秋節(춘추관)記注 官(기주관)을 겸임, 짧짜t(향촌)의 싱-호부조를 위해 呂B:;~~約(여씨향약)을 팔도에 실시케 하였 다. 이듬해 부제학이 되어 미신 타파를 내세워 昭格暑-(소격서)의 폐지를 강력히 주창하여 많 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를 없애게 하였다. 1519년 대사헌에 승진하여 세자 副(부)훨客(빈객)을 겸했으며 賢良科(현량과)를 설치하여 자기 일파의 新進(신진)土類(사류) 특히 30대의 소장학자를 요직에 안배하는 한편, 훈구파 를 외 직 에 몰아내고, 특히 靖國(정국)功닮(공신)이 너무 많다고 剛勳(삭훈)을 주장하여 전 공신의 4분의 3을 삭제하는 등, 급진적 인 개혁을 단행하여 마침 내 훈구파의 결정적 반발을 야기했다. 훈구파의 홍경주 · 남곤 · 심정 등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움직 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 고하게 하고, 대궐 나무 잎에 과일즙으로 「走웹寫王」 이란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감아먹게 한 디-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다 왕에게 바쳐 趙民(조씨)가 왕이 되려한다는 의심을 조 장시키는 한편, 밤에 페武門(신무문)을 통해 비 밀리에 왕을 만나서 위협에 가까운 논조로 趙光피[l(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하여 조정을 문란케 한다고 무고했다 이에 조광조의 道學的(도학적)인 언행에 염증을 느껴오던 왕은 그를 투옥하고 훈구파의 끈덕진 공격으로 마침내 陽死(사사)되었다. 선조 초 영의정에 追뺑(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능주의 竹樹끓院(죽수서원)에 제 향되었다 시호는 文표公(문정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