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page


65page

박소종 선생은, 경남 밀양(密陽) 사람이다. 1919년 3월 13일 밀양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밀양 장날의 만세운동은 윤세주(尹世胄)·윤치형(尹致衡) 등이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에 참례하였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와 이 사실을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 전홍표(全鴻杓)에게 전하면서 추진되었다. 전홍표는 밀양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으므로 많은 청년들이 그를 따랐다. 그리하여 3월 12일 밤 박소종은 윤세주·윤보은(尹輔殷)·정동찬(鄭銅燦)·김소지(金小池)·박만수(朴萬守) 등과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의논하고 윤세주 집을 거점으로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3월 13일 밀양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밀양면사무소와 부북면(府北面)사무소 등지에서 등사판을 몰래 가져와 위북산(偉北山)에서 밤을 새워 수백 매를 인쇄하는 한편, 수백 개의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오후 1시 30분경, 박소종 등은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장터에는 수천의 군중이 운집하여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밀양거리는 온통 만세군중의 시위로 수라장이 되었고, 부산에서 출동한 일본헌벙과 수비대는 주모자 체포에 무자비한 행동을 가하였다. 그러던 중에도 다음날인 3월 14일에는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와 행진하니 거리의 주민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결국 군경의 탄압으로 시위대열은 해산되고 박소종 등의 주모자는 일본 헌병에 의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자료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