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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 총통과 대한민국. 장제스 1887년 10월 31일~1975년 4월 5일 또는 장중정은 중국의 군인, 정치, 군사 지도자이다. 종교는 기독교이며, 항푸군관학교 교장, 국민혁명군사령관,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중국 행정원장,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중국 국민당 총재, 삼민주의 청년단 단장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5월 20일부터 1949년 1월 21일까지는 중화민국의 초대총통과 중국본토의 국가원수를 지냈고 1950년 3월1일부터 1975년 4월 5일까지 2~5대 중화민국총통을 역임했다. 1930년대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다. 1932년 이봉창의거와 윤봉길의사를 계기로 장제스는 한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키던 김구와 조선민족혁명당 김규식, 김원봉등을 설득하여 연합전선 구축을 권고하기도 했다. 1943년 11월 미국의 루즈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과 이집트의 카이로에 모여서(카이로회담)을 하였다. 이때 한국 독문제를 거론하였고 회의에서는 한국 민중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는 결의를 얻어냈다. 그가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건의한것에 대해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카이로회담에서 장개석으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선언문에 명문화시킨것의 원인은 윤봉길의사거에 있다고 보았다. 1945년부터는 다시 중국공산당과 사이에 국공내전이 발발하여 1949년에는 종국적으로 패배하여 대만으로 도피하게된다. 타이완으로 건너간 후 1950년에 총통으로 취임하고 본토회복을 위한 몇아례 대륙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내치에 전념하여 한때 부패했던 국민당조직을 개편했고 공산국가에 맞서는 자유의 선봉으로 나섰다. 1953년 대한민국 진해에서 이승만대통령으로 부터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건국하는데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1972년 초 닉슨의 중공방문으로 미국과 중국사이에 관계개선이 이루어지면서 공산국가와 수교한 나라와는 국교를 단절하게 되었고 결국 중화민국은 고립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1975년에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