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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태는 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대한제국 정부에서 군수로 재임 중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그후 1911년 경남 고령(高靈)에서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15년 음력 1월 15일 그는 박상진(朴尙鎭)·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박영모(朴永模)·홍주일(洪宙一) 등과 함께 달성군 안일암(安逸庵 : 현재 大邱市 安逸寺)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部)를 결성하고 통령(統領)에 선임되어 동단을 이끌었다. 동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주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들이 참여하여 사립교육기관과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그는 서상일의 태궁상점(太弓商店), 윤한병(尹翰炳)의 향산상회(香山商會), 안희제(安熙濟)의 백산상회(白山商會)의 경영에도 참여하여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1917년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에 가입하여 3·1독립운동 당시에는 동단의 변상태(卞相泰)·김관제(金觀濟)로 하여금 경남 일원에서 만세시위를 주도케 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의 영향으로 국외의 많은 애국지사들이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독립운동의 기운이 고조되자, 주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서 단원들의 군자금 모연을 통해 이에 필요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그는 1919년 4월 장석영·김응섭(金應燮)·조긍섭(曺肯燮)이 주관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 영문으로 번역케 하였으며, 김응섭·남형우(南亨祐)가 이를 휴대하고 상해(上海)로 건너갈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그는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향리인 달성군에서 덕산학교(德山學校)·송석정(松石亭)·회보당(會輔當) 등의 교육기관을 세워 항일민족교육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