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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봉은 경상북도 청도(淸道) 사람이다.이곳은 3월 15일 밤 김상구(金相久)·김종태(金鍾台)·손기현(孫琪鉉) 등이 동포의 궐기를 촉구하는 20여매의 격문을 작성하여 운문면 방음동(雲門面芳音洞)·대천동(大川洞)·오진동(梧津洞) 일대에 붙였다가 18일 운문주재소에서 조사를 받은 바 있었다. 김진효(金鎭孝)·홍해성(洪海性)·김종태 등은 이날 조사를 받고 돌아오는 도중, 면사무소에 들어가 면서기들에게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제작하도록 부탁하여, 그것을 휘두르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그러나 이튿날 오후 6시경, 청도경찰서에서 일본경찰 1명과 순사보 4명이 김상구를 체포하기 위하여 출동했다가 부재중이자 대신 그의 어머니를 이웃의 문명학교(文明學敎)로 연행하려 하였다. 이때 이를 목격한 김의택(金義澤)·김병준(金秉濬)은 이를 말리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김병준으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즉시 3백여명의 주민과 함께 곤봉을 들고 현장으로 달려가 순사들에게 곤봉세례를 가하여 쫓아버렸다. 그러나 그는 곧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재식은 경북 청도(淸道) 사람이다.1919년 3월 18일 청도군 운문면(雲門面)에서 김진효(金鎭孝)·김종태(金鍾台)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운문 장날을 이용, 다수의 군중과 함께 일경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들을 구타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붙잡혔다. 이해 5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7월 5일 대구복심법원과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