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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 향 민 의 삶 26 극심한 흉어로 나락에 떨어지는 일이 빈번했다. 1961년 2월 1일자 동아일보에서는 “명태잡이는 흉어인데 뜯 어먹을 사람만 늘어나 명태수보다 사람수가 더 많다”는 우스개 푸념을 소개하면서 “함경도 어민들만 산다는 속초5구(지금의 청호동)의 1/3이나 되는 가구가 끼니를 못 잇고 있다”고 보도 했다. 다음해인 1962년 10월 2일자 경향신문에서는 “속초 3구 산기슭에 24가구가 움막을 짓고 살고 있는데 오징어가 안 잡히 자 집집마다 식량이 다 떨어져 성묘객에게 음식을 구걸해 먹거 나 하루에 국수 10원어치나 고구마 몇 개로 연명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움막집도 부러운 노숙자들도 다수 있다고 했다. 군 출신들이 속초사회 지도층 형성 미군정 시절 실향민 정착과정에 군과의 관련성이 주요하게 작용한 것은 이후 실향민 도시 속초의 사회지도층 형성과 지역 사회 집단의식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휴전으로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실향민들 정착에 큰 역할을 한 군관계자들은 지 역에 정착해 지역사회 지도층을 형성했다. 한국전쟁 중에 대북 공작활동을 주도했던 HID 김동석대장은 속초시가 승격된 이후 속초시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동향별 실향민 단체를 결성하 고 조직을 이끈 이들도 이들 군 출신들이었다. 수복지구와 접경지역이라는 특수성만이 아니라 이들 군 출신 의 사회지도층도 속초지역을 강력한 반공기지로 만드는데 막대 한 정신적, 사회적 영향을 끼쳤다. 군 출신이 주도하는 지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