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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남 실 향 민 들 은 왜 속 초 로 모 여 들 었 을 까 ? 25 겨가고 미군 부대도 철수하게 되었다. 그 때 마침 속초 바닷가 경기가 크게 불이 붙기 시작해 최고의 수산업 경기가 형성되었 다. 전쟁 중에 노무인력으로 들어와 정착한 실향민들도 수산업 으로 일자리를 전환하게 되었다. 월남 실향민들에게는 속초가 고향과 가장 가까운 바닷가인데다 이북에서 생업으로 매달리던 고기잡이로 쉽게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더구나 고향 사람들이 같이 모여 살 수 있어 속초는 월남 실향민들에게 다른 지역보다 우수한 정착지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당시 읍지기록을 보면, 1955년 속초의 어업인구가 23.9%로 농업인구 20.7%를 능가했다. 어민가족은 1,146호 5,666명이 며, 농민은 895호 4,901명이다. 1954년 무렵부터 동해안 수산 업은 최고의 활황을 기록했고, 군정 시절에는 미군정에서 수산 업 진흥을 위해 어민들에게 로프와 와이어, 범선 범포, 명태 그 물과 실, 못 등 구호물자를 나눠주기도 했다. 1950년대 말 속초는 부산 다음으로 전국 2위의 어획고를 기 록하면서 인구도 급증했다. 결국 1963년 속초읍은 인구 5만명 이 넘어 시로 승격하게 되었다. 수복된 지 12년 만에 시 승격 이 이뤄진 것이다. 속초시의 승격은 수복지역의 발전상을 보여 주어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기려는 정권 차원의 배려도 없 지 않았다. 그러나 겨울에는 명태, 여름에는 오징어가 풍어를 이루는 속 초라고 해도 가난한 실향민에게 마냥 좋은 곳만은 아니었다. 월 남 실향민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많은 주민들이 몰린 속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