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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3.1독립만세운동사 현재의 고성군으니 3.1독립만세운동 당시에는 간성군이었다. 이곳은 강원도 동해안에서 가장 먼저(3월 17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이며, 일본 경찰이 주둔한 다른 지역과 달리 독립운동이 활발하여 일제 헌병의 관할이었다. 고성면에서는 1919년 3월에 이미 일제의 보병부대인 20사단 74연대 1개소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간성면 신북면 계월리 청년 김동원(22세)이 초순에 '조선독립선언서' 1통을 입수하여 3월 13일 밤에 고성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자택으로 가지고 와 첫머리에 '고성재판'이라는 제목을 붙인 독립선언서 50매를 등사하였다. 다음날 14일 고성읍 밖에서부터 간성가도, 지경리까지 게시판에 붙이거나 길위에 뿌려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고 독립운동의 분위리를 조성하였다. 이 일로 김동원은 출판법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판결을 받았다. 한편 강원도 철원일대를 중심으로 조직된 '철원애국단' 단원인 토성면 출신 김형석, 이근옥, 이석규, 김연수, 문명섭등이 태극기를 준비하고 주민 약 300여명을 규합하여 3월 14일 토성면 교암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이어서 군내면 하리 출신인 이동진은 개성 한영서우언에 다니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친구인 간성보통학교 학생 함기석과 함께 1919년 3월 17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자택에서 '지금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일으키니 문명교육을 받은 누구라고 독립을 위하여 만세를 부르자'라는 내용의 선전문을 만든 후 간성보통학교 4학년 교실입구에 붙였다. 이 선언문을 읽고 자극받은 정정구 외 12명이 학생 150여명을 운동장으로 모으로 대한독립을 외쳤다. 3월 27일 군중과 함께 간성군 교암, 죽도, 봉평, 간성장터에서 태극지를 흔들며 격렬한 만세운동을 펼쳤고, 이를 계기로 양양등 동해안 여러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통분하게도 이를 주도하였던 김백운등 22명은 헌병에 체포되어 1년이상의 고문을 겪으면서 옥고를 치렀다. 아울러 통천군 임남면 장전리(1919년 5월 15일 고성군 편입) 기독교인 최상린을 중심으로 신북면 사무소에서 김두만 안홍식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90여매를 등사하고, 3월 31일에는 태극기 250개를 만들어 4월 1일 장전리 기독교인의 집을 찾아다니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할것을 권유하였다. 4월 2일에는 기독교인 약 20여명이 모아 미리 만든 태극기를 배부하고 앞장서서 동리(고성읍) 다리까지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다음날 100여명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경찰주재소까지 행진하는 등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거사를 도모한 최상린, 김두만, 안흥식, 우낙영, 박성준, 유시국 등은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 소위 보압법및 출판법 위반혐으로 구속, 수감되었으며, 또한 1년이상의 모진 고문을 당하며 옥고를 치러야했다. 국제적 이목을 꺼려한 일제는 3.1독립만세운동의 규모를 고의로 축소하여 그들의 만행을 감추려하였다. 실제로 헌병에 검거되고 투옥된 독립운동자 수는 일제의 기록보다 훨씬 많았다. 3.1독립만세운동은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자주독립운동이며, 한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에 천명하며 우리민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이로써 일제가 통치정책을 바꿀지 않을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었다. 특히 3.1운동을 시작으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였고, 횃불이 된 3.1독립만세운동은 아시아 약소국가의 민족운동과 저항정신의 선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