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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갑 목사(1888-1970) 대한민국 3년1월1일 임시정부 급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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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신군 인주면 공세리에서 아버지 이도희와 어머니 박안나 사이에 2남으로 출생하였다. 이규갑은 충무공 이순신의 10대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사서삼격을 공부하신 부으로 가정에서 자녀들을 잘 가르쳤으며 애국심이 강한 분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부인으로는 처음으로 상소를 올렸고 '의족을 일으키라'고 역설함으로 포도대장이 이에 감동되어 고종에게 상소한 일도 있었다. 그는 1906년 한성사범학교 졸업후 충남 홍주의병에 참가하여 운양관으로 활약하였고, 1909년부터 다시 교육일선에 투신하여 후배양성에 힘쓰는 중 1910년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다가 한일합방 특사로 출감하였다. 그리고 김리교 협성학교에 들어가 수학하다가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나 와서다대학 정치과에서 공부하였다. 귀국후 공주 영명학교 교감으로 재직하였고, 지하운동에도 참여하는 한편 직산 예성학교를 설립하여 영세한 아동의 교육에 헌신하다가 비밀결사사건으로 일본 헌병에 검속되어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역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애라(1894~1921)와 결혼 후 평양으로 가서 교직에 종사하던 중 신흥식, 길선주, 안세항등과 함께 독립운동 평양대표로 선출되어 1919년 2월에 상경하여, 기미년 독립선언 거사 준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 해 4월 2일 인천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의 한사람으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를 조직, 평정관에 선출되었다. 이 무렵 이애라의 갓난 아기가 일결의 폭행으로 사망한다. 아이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4월 20일 상해에 도착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5월 4일 대한청년단 서무부장 겸 서무부 비밀부원을 역임하여 임시정부 내각을 원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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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 제5회 임시의정원에서 충청도 의원으로 참여하였고, 제6회 임시의정원 중에는 '한성정부'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조안이 제안되어 통과됨으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한 통합임시정부가 출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후 중국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군사교육을 시키던 형 이규풍을 찾아가 군관학교를 도왔고 1924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감ㄹ회 소속으로 목화하였다. 1927년 무렵 귀국하여 1929년 4월 27일 권유복, 서광훈, 심의성, 정관진등과 함께 신간회 경동지회 설립에 참여하였고, 그 후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후에는 목회잘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9년 6월 집사목수 안수를 받고, 이듬해 9월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1년부터 돈암리교회, 도화동교회, 광화문교회, 의정부교회를 담임하였다. 일제 말인 1938년 기독교 탄압으로 검속당해 평양감옥에 수감되는 등 전후 36차례 검거되었다. 또한 우리 민족의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1941년부터 1945년까지 꽃재교회(구 왕십리교회)의 담임하며,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예배시 일본어 사용을 금지했으며, 혁신교단이 통보했던 국기배례와 궁성요배 국민서사 낭독을 거부했다. 8.15와 함께 자유를 찾은 그는 건국준위원회 재무부장으로 취임하여 건국준비사업을 도았고, 이 무렵 남산교회를 설립하였다. 1946년 4월 5일 조선감리회 유지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친일파감리교회 지도자와 정면으로 대결하였고, 1950년 5월 국회의원에 당선도어 문교사회분과 위원장,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으로 활용하였다. 1962년 3월 1일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70년 노환으로 별세하였고, 그의 유해는 사회장으로 아산군 영인면 선영에 안장되었다. 꽃재교회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나라를 사랑하고 꽃재교회를 지킨 헌신을 기억하며, 3.1만세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99주년 맞이하는 이 때에 기념비를 세운ㄷ. 2018년 2월 28일 기독교대한감리회 꽃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