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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을사보호조약으로 일제 식민지배라는 치욕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 금성산 남티재를 넘어 40리 길을 걸어 비봉교회로 신앙의 순례를 다니던 박건표(朴健杓)를 비롯한 교우들에 의해 1906년 1월 5일 이 곳 효선 땅에 남녀 신도 80명의 효선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교회 설립 6년 후에는 200여 명의 신도들이 모일 만큼 성정하였고 1919년 3.1만세운동 때는 교회가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특히 본 교회 박장호(朴章鎬) 조사는 대구 서문밖 장터 만세 운동에 앞장서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6월의 옥고를 치루는 등 교회는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1931년 교회가 사립 강습소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가르치고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앞장서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와 개화운동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1937년 신사참배의 광풍 속에서도 본 교회를 비롯한 4개처 교회를 순방하며 목회 하시던 권중하(權重河) 조사는 일제의 신사참배요구를 거부하다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 초주검이 되었으나 꿋꿋이 신앙의 지조를 지키셨다. 출옥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9년 함창에서 영광스런 순교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1941년 일제에 의해 교회가 폐쇄될 때까지 교회는 미족의 고난에 함께하며 동민의 정신적 지주로, 신문화 운동의 창구로, 인재양성의 도장으로, 그리고 구원의 말씀이 샘솟는 영혼의 안식처로 그 사명을 감당하였다. 8.15해방과 함께 다시 교회가 문을 열게 되자 예전의 많은 신도들이 모여 들었다. 1947년 이후 에는 해방 전부터 기도실로 있었던 화곡 상전 덕동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면서 분립되었다. 1960년 총회 분열의 여파로 이 곳 효선교회도 통합 합동으로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