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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용득(규병)이요 자는 두칠이며 관은 동래로 정씨다. 시조는 고려초기 안일호장을 지낸 휘 회문이요, 26세손 휘 현진은 등억리 화천의 입향조이시며 공의 4대조가 되신다. 증조는 휘 윤형이요 조는 휘 수언이시다. 공은 1885년 7월 28일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256번지에서 29세손 휘 갑회공과 경주김씨 휘 고연 여사의 외동 아들로 태어나셨으며, 증도 휘 윤형 후손으로 이루어진 화천대문중의 종손이시다. 공이 25세가 되던 1910년에 우리나라는 일본에 국권을 강탈 당하였고 공은 평소 이에 대하여 비분강개하셨으며 독립에 대한 열망을 품어 오셨다. 공은 선비로서 나라 잃은 슬픔에 죽음을 무릅쓰고 자주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태극기를 비밀리에 만들어 주동자들과 거사를 하기로 의논하여 언양 장날인 1919년 4월 2일 11시에 언양 장터에서 총검을 든 일본경찰과 맞서 싸우며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2,000여명의 장꾼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우렁차게 외치며 장터로 시위 행진 하던 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셨고 그후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형의 언도를 받으시고 태형 90도를 집행 당하셨다. 출감하신다는 연락을 받고 문중에서 울산까지 50리 길에 소 달구지를 끌고 가보니 볼기가 터지고 물집이 생겨 걸음을 걷지도 못하시어 소 달구지 위에 엎드려 집으로 돌아오셨으며, 수감 당시 왜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 발병된 정신분열증으로 7년간 병고를 치르시다가 조국광복의 영광도 보지 못하시고 부인 경주김씨 도수 여사와 어린 아들 만호(우현) 딸 귀순 남이 말남을 두시고 1927년 11월 29일 42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셨다. 오호라! 공의 나라를 위한 고귀한 희생이 없었던들 어찌 ㄱ권을 도로 찾을 수 있었겠는가? 오늘날 영광된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후손들은 공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충정을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에 공과 공의 배위에 대하여 영원히 추모하는 정을 여기 한 조각의 돌에 새기는 바이다. 2011년 7월 일 동래정씨 장사랑공(창윤)파 화천대문중 찬문 32세손 공의 손자 타관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