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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의사 생가터 / 소재지 : 부산 동구 중앙대로 471-10 (범일동 183) 박재혁 의사는 1895년 5월 17일 박희선과 이치수의 1남 1녀, 3대 독자로 태어났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모금에 참여하였고, 사립부산진보통학교를 거쳐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상업학교 재학 중 좌천동.범일동 친구 최천택, 오재영(오택), 김병태, 김영주, 박흥규 등과 함께 〈동국역사〉 책을 등사하여 배포하고, 비밀결사 단체인 〈구세단〉을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1916년 부산전기회사의 전차 차장을 하였고, 그 후 경북 왜관에서 곡물 무역상 점원으로 일하였다. 1917년 6월 이후 상해와 싱가포르, 부산 등지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모색하다가 1920년 상해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 해 8월에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독립 자금과 폭탄을 받고, 9월 나가사키와 대마도를 거쳐 부산에 잠입하였다. 처음에는 조선총독부를 폭파할 계획이었으나 당시 독립운동가들 체포에 중심 역할을 하던 부산 경찰서 하시모토 서장을 제거하기로 변경하였다. 1920년 9월 15일 오후 2시 30분경 중국 고서적 상인으로 변장하고 서장실로 들어가 보자기를 풀어 고서를 설명하던 중, 폭탄을 꺼내 들고 서장에게 일제의 조선 침탈을 꾸짖고 폭탄을 터뜨렸다. 서장은 부상을 입었고 박재혁도 다리에 부상을 입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것은 의열단 최초로 성공한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 신문은 "부산 경찰서 투탄 사건은 천만의외라. 이야말로 동경 한가운데 투탄한 것과 같다."라고 전했다. 이후 박재혁은 단독범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1921년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박재혁은 혹독한 고문과 사건 당시의 상처로 몹시 신음하다가 대구감옥에서 폐병까지 얻어 극심한 고통의 수감생활을 하던 중 "왜적의 손에 욕보지 않고 내 손으로 죽자."라고 결심하고 단식을 하였다. 박재혁은 형 집행 전인 1921년 5월 11일 그의 나이 27세에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지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