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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든 동지는 인천의 여러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하며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과 노조설립을 위해 활동해왔다. 특히 인천의 글로리아가구에 입사해 노동조합 활동을 주도했는데 대학생 출신 활동가라고 회사에 알려졌음에도 조합원들의 절대적인 신뢰로 오히려 노조 교육 부장의 직책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노조가 결성된 지 두 달 만에 공장이 모두 불에 타 더 이상의 조업이 불가능하게 되자 회사는 동지를 해고시켰고 이에 맞서 참으로 지루하고 힘든 복직 싸움을 전개하였다. 그 후 동지는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교육부장과 조직부장으로 활동했고 민 주노총 조직부장으로서 남다른 책임감으로 헌신적인 활동을 하였다. 특히 IMF 상황 속에서 민주노총이 재벌개혁과 고용안정을 위해 긴박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부터 부족한 인원으로 더욱 바쁘고 힘들게 활동하였다. 각종 집회와 농성을 준비 하고 참석하였으며, 지도부와 함께 산하 노조들을 현장 순회하고 방문하였다. IMF 상황을 빌미로 각 사업장에서 부당노동행위가 벌어지자 이의 해결을 위한 활동에 동분서주하였다. ’98년 2월 4일에는 부당노동행위 사업장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조대표들과 국 민회의 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하면서 피로가 극심하게 누적되었다. 그 후유증으 로 두통과 가벼운 얼굴마비, 그리고 시력장애가 나타났으나, 그 뒤에도 2월 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를 준비하고, 2월 10일, 11일에도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점검하기 위해 쉴 틈도 없이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11월 오후에는 두통과 눈 증세 가 악화되어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어 안과에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그곳에서 뇌 출혈로 쓰러졌다. 그리고 13여일간 뇌사상태에 빠져 인공호흡기로 목숨을 이어 가던 동지는 결국 2월 24일 오후 1시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동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추모집「사라지는 것은 없다」를 ’98년 9월 23일 발 간하였다. 최명아 (당시35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63년 11월 10일 충북 음성 출생 1985년 2월 이화여대 행정학과 졸업 1985년 인천의 태성전자, 인우전기, 한미실업 등에 입사 1986년 인천글로리아 가구 입사 1989년 글로리아 가구 노동조합결성. 교육선전부장으로 활동 1989년~1995년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교육부장, 조직부장으로 활동 1995년 12월부터 민주노총 조직국 조직1부장. 1998년 2월 11일 진료차 서울대 병원에 갔다 쓰러져 뇌사상태에 빠짐 2월 24일 오후 1시경 운명 끝내살리라 |167| |16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신자유주의시기 노동 우리맘속에너를심어 일년사철피는꽃나무로너는자라리니 꽃은피고지지만우리가지상에살아있는한 너는지지않는꽃이러니 우리가슴속에영원히피어나리 - 「사라지는것은없다」발간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