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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오랜 보수야당 투쟁경력을 바탕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평화통일의 기초가 되 는 6∙15 남북공동선언을 통해 한반도 평화정책에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금강산 관광을 통하여 민간교류를 활성화 하기도 하였다. 노동자 민중의 진보진영에서는 오랜 숙원이던 진보정당이 속속 건설되었다. 청 년진보당,민주노동당이 창당되어 진보진영의 제도권 진입을 시도하였다. 특히 민 주노동당은 2002년 6월 지방선거에 정당득표율 8.13% 획득, 제3당으로 도약하면 서 의회진출의 교도보를 마련하게 되었다. 2002년 12월 민주당은 노무현을 내세워 네티즌 조직 노사모와 돼지저금통으로 정 권을 재창출하였다. 1980년대 인권변호사로, 5공청문회로 잘 알려진 노무현 대통령 은 국민의 바람을 실현해줄 것 같은 이미지와 당선이후 열린우리당 창당, 그리고 사 상초유의 대통령 탄핵을 18대 총선정국으로 돌파하여 의회 과반수를 장악하였다. 그 러나 노무현정권의 태생적 한계는 곧 바로 폭로되었다. 비정규직문제, 손배가압류, 단체협상을 맺기 위한 노동자들의 분신∙자살을 강요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이라크 침략전쟁 파병, WTO협상,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노동정책. 민간 부분은 물론 공기업이 앞장서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은 정권재창출과 엘리트 민주주의 완성을 위하여 소위 4대입법(국가보안법철페, 과거 청산법, 사립학교법개정, 언론개혁법)을 추진하였으나 이것은 노동자민중의 바램과 먼 보수야당과 타협할 수 있는 한계를 나타냈다. 한편 민주노동당은 18대 총선에서 총10석으로 사상최초로 의회진출에 성공하였다. 소수로 시작한 의정활동을 통해 많 은시행착오와한계를보이고있으나나름대로의실험을계속하고있다. 노동자 민중진영은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새로운 전략과 전술로 신자유주의 정책에 파열을 내고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정규직화, 민중생존권 정책, 쌀개방반대등을쟁취하기위한과제를남겨두고있다. 끝내살리라 |163| 1998~ 김대중 정권, IMF 신자유주의 공세 그리고 노무현 정권 김대중 정권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와‘국민의 정부’기치아래 출범하였다. IMF 책임이 한국의 천민자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민중에 게 고스란히 전가되었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노동자 민중에게 그대로 관철하 려는 정책을 밀고 나갔다. 기업 구조조정은 기업 인수합병 절차 간소화, 부실기업 퇴출 등의 조치로 행해졌으나 재벌개혁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오히려 일부 재 벌의 강화를 가져왔다. 반면 노동시장 구조조정 칼날은 무서운 것이었다. 김대중 정권은 노사정위원회 논의를‘사회적 대타협’이라고 선전했지만 일방적으로 자본 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공공부문 구조조정은 공기업 민영화 정책으로 나타 났다. 포항제철, 한국통신, 한국전력 등이 민영화 대상에 들어갔다. 국민의 세금으 로 키운 알짜배기 공기업을 해외에 매각했다. 공기업 민영화는‘공공성’의 후퇴라 는 점에서 노동자 민중의 생활에 더욱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결과 재벌은 살아났고,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노동자들은 해고로 인한 고용불안과 근로조건 저하에 시달려야 했다. 자본의 해외매각이 진행되면서 고용은 더욱 불안정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필사적으로 전개했다. 그러나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와 탄 압은 그치지 않았다. 공안검사가 조폐공사노조 파업을 유도하기도 했고, 대우자동 차노조, 롯데호텔노조, 사회보험노조 등 노동자 파업현장에 무자비한 폭력경찰을 동원했다. IMF 체제 극복과 청년실업문제 해결에서 김대중 정권 부문별한 카드산업과 벤처 산업으로경제활성화정책을폈으나결국400만명이넘는신용불량자와벤처산업의 거품이 고스란히 노동자 민중으로 전가되었다. 즉 경기의 거품은 이후 만성적인 경기 침체와빈익빈부익부의20대80 사회를고착화시켰다. |162|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총 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