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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64년 영광군 신하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살람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비인가 학교인 영광기술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검정고시 합격 후 동지는 영광종합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83년 서울대 식품공학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교내에 경찰이 상주하고 있었다. 오직 공부밖에 모르는 동지 는 도서관 너머로 시위현장을 지켜보고 하였다. 우연히 시위현장에서 넘어진 여학생을 주위에 사람들과 같이 건물로 피신시킨 것을 계기로 현실운동에 참 여하게 되었다. 교내‘황토’라는 써클에서 활동하였다. 2학년때 후배를 지도 하고 각종시위 실무등을 하다가 ’86년 고향에서 군복무를 하였다. 고향에서 맞이한 6월항쟁은 동지의 삶을 더욱 굳히게 하였다. 군복학 후 동지는‘우리 농촌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 89년 동지는 학업을 포기하고 본견적인 농민운동에 투신하기 위하여 전국농 민운동연합 간사로 활동하였다. ’90년 학생 때 농민관련 운동을 하다가 만난 평 생 동지와 결혼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본격적인 농민회 운동을 하였다. ’90년 영광군 농민회를 주도적으로 만들고 초대 사무국장으로 농민회 기틀을 다졌다. ’92년 대규모로 벌어진 쌀 적재투쟁을 영광군에서 주도하면서 농민회의 안착화 에 노력하였다. 동지는 항상 선두에서 투쟁을 전개하였다. 군수실 점거, 경찰서 장 점거농성 등 이땅의 농민들이 진정한 주인으로 그리고 생산자가 대접받는 세 상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93년 전남 도연맹 정책실장을 맡으면서 전국단위 대규모 농민투쟁을 기획하 고 정책을 생산하는 등 쉴 틈 없이 전개하였고, 동지는 ’96년 다시 군단위로 돌아 와 기초를 다졌다. 이즈음 난생 농민후계자가 되어 대출로 논 50마지기와 밭 18 마지기를 구입하였다. 그러나 이 땅을 경작하지 못하고, ’97년 2월 25일 영광군 농민회 면지회 총회준비모임을 끝내고 귀가하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평생 동지 의 곁의 떠났다. 동지는 이땅의 농민해방의 불꽃으로 진정한 농민의 벗으로 삶은 살아온 이 땅의 전정한 농민운동가였다. 동지를기억하는사람들이추모문집「녹두꽃으로피어나리」를 ’98년발간하였다. 끝내살리라 |153| 지용진(당시33세) 영광군 입석리에 안장 1964년 영광군 영광읍 신하리 출생 1977년 3월 영광실업기술중학교에 입학(비인가) 1979년 고입검정고시 합격 1980년 영광종합고등학교 입학 1983년 3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식품공학과 입학 '황토'라는 학생운동써클에서 활동 1986년 고향 영광에서 군 복무 1988년 서울농대에 복학하면서 학내에 '우리농촌연구회'라는 동아리를 만듬 1989년 농민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학업을 포기, 전국농민운동연합 간사로 일함 1990년 3월 평생동지 이태옥과 결혼 후 고향으로 삶의 터전 옮김 1990년 8월 영광군 농민회가 창설되면서 농민회 사무국장으로 활동 1993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남도연맹 정책실장 1996년 농어민후계자로 선정되고 논50마지기, 밭18마지기의 구입 1997년 2월 25일 영광군농민회 면지회 총회준비모임을 끝내고 귀가하다가 교통사고로 운명 |152|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김영삼정권 사회 네가슴깊은곳까지 칼바람으로휘몰아치던 우루과이태풍 WTO 안개속에서도 수매가동결수매량축소의한계상황에서도 분단된산하질곡의역사가 양어깨를짓눌러도 끈질게도 끈질게도 여린볍씨의새눈은뜨였나니 새봄은오는알 - 입석리산록에잠든용지에게중에서- 「녹두꽃으로피어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