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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한마디로 암울했던 과거 군사정권 시절을 거치며 줄곧 재야 민주운동 을 주도해 온 정신적 지주였다. 성직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사회진출 후에도 평범한 목회자로서 신학대 강단에 섰던 동지가 유신정권의 압제에 분연 히 맞서 민족민주운동에 첫 발을 내딛은 것은 지난 ’74년 10월 반유신 재야단체 인‘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가하면서 부터였다. ’76년 3월 1일‘3∙1 민주구국선언사건’을 주도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 로 구속돼 20년형을 선고받으면서 첫 번째 옥고를 치르게 된 이후 삶의 절반 가까 이를 감옥에서 보냈다. 그 과정에서 ’85년 3월 민주통일국민회의, 민중민주운동 협의회 등 당시 재야단체를 통합한 민통련 발족을 주도하고 초대 의장으로 활약 했으며 ’89년초 전민련의 출범 후에는 전민련 고문을 맡는 등 재야운동의 대부로 서 큰 업적을 남겼다. 동지는 ’89년 3월 통일문제를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직접 논 의하기 위해 방북하였다. 이 사건은 통일을 구두선처럼 외치면서 실제로는 탁상공론만 일삼았던 당시 정부 당국자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또한 민족의 통일의지를 온 민족에게 호소하 기 위한 의거였다. 동지는 이 사건으로 ’90년 6월 대법원에서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형이 확정 돼 또 다시 수감되기에 이르렀으며 같은 해 10월 형집행 정지로 석방됐으나 ’91 년 6월 재수감돼 통산 6차례에 걸쳐 8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동지는 기회만 있으면‘분단 50년 이내에 통일을 이루지 못하면 분단이 고착 된다’며 통일운동에 남다른 집념을 보였다. ‘통일은 됐어’라고 힘주어 외치던 동 지는 유신의 압제에 분연히 맞서고 이후 치열한 반독재 투쟁과 통일운동으로 일 관해 오신 민족의 큰별이었다. 문익환(당시76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18년 6월 1일 만주 북간도 명동에서 아버지 문재린, 어머니 김신묵의 맏아들로 태어남 1976년 3월 1일 ‘3.1 민주구국선언’사건. 성명서를 초안하여 명동성당에서 발표.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고 동생(문동환), 아내, 맏아들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감 1977년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25일간의 옥중단식(전주교도소) 1978년 10월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폭로한 일로 형집행정지 취소, 재수감 1980년 5월 17일 ‘내란예비음모죄’로 연행되어 공주, 안양, 서울 등지에서 복역, 공주교도소에서 23간 단식 1985년 5월 20일 서울대 및 대구계명대 순회강연 중‘선동죄’명목으로 수배되자 대구경찰서에 자진 출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명목으로 기소되자 재판 거부. 1심에서 3년형을 받음 1988년 3월 대통령 선거 실패를 책임지고 민통련 의장직 사임 7월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민주단체 협의회”공동대표 1989년 1월 21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상임고문 3월 25일 통일의 길을 열기 위해 방북, 북한 조평통과 공동성명 발표 1991년 1월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위원장 5월 강경대 열사 장례위원장 등의 활동으로 형집행정지 취소되어 재수감 1992년 1월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1993년 8월 제4차 범민족대회 대회장 11월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운동 제창 1994년 1월 18일 운명 끝내살리라 |123| |122|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김영삼정권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