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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75년 대구에서 출생한 동지는 영남대학교에 입학해 문화인류학과 학생회와 총학생회 활동 등을 하면서 활발하고 열정적인 대학시절을 보냈다. 다소 고집이 세고 악착스러워 가끔 친구들이나 선배들에게 충고를 받기도 했 던 동지였지만 일에 대한 욕심과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에 대한 열망이 누구보다 도 강했기에, 그 열정적인 품성으로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 부터 앓아온 기관지 천식으로 조금만 뛰거나 피곤해도 그날 저녁 꼭 병원으로 실 려 가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그런 몸도 동지의 통일에 대한 의지에는 전혀 걸림돌 이 되지 못했다. ’95년 학회지「사람」편집장을 지냈으며 영남대 오월 투쟁본부산하 오월학살 자 처벌투쟁 선봉대원으로 활동하면서 투쟁의 신심을 다져갔다. ’96년 8월 13일, 범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학교 선후배 50여명과 상경 길에 올랐다. 출발 당일까지 사람들을 만나 함께 갈 것을 이야기하며 열정적으로 대회 를 준비하던 동지는 그날도 몸이 좋지 않았지만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 로 올라가는 길로 나섰다. 대회장인 연세대가 원천봉쇄가 되어 동국대로 장소를 옮겨 숙소조차 마련되지 못한 상태에서 아스팔트 바닥에 신문지를 덮고 하루 밤 을 보낸 동지의 몸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래서 다음날 대회장 진입을 위해 모두 연세대로 떠났지만 동지는 시위도중 다친 몇몇 동지들과 동국대에 남아있었다. 동지는 14일 오후 5시 총학생회와의 통화에서“몸이 안좋아 아무것도 먹지 못했 다. 원천봉쇄로 많은 사람들이 연세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라고 통화한 후 바로 약간의 간식을 먹는 도중 음식물이 기도에 막혀, 뇌사상태로 쓰러져 결국 9 월 9일 21세의 꽃다운 나이로 조국통일의 희망새가 되어 날아갔다. 숨이막힐정도로쏟아지던최루탄연막속에서 제가들었던깃발은 친북도용공도좌경도아니었습니다. 분단조국이철책을뛰어넘어비상하고싶은 어머니, 딸의날개짓이었습니다. 어머니 이제제가죽어서야 제가가보지못한땅, 분계선너머임진강건너 나와다를바없는똑같은사람들, 형제들사는 북녘땅으로가보겠습니다. - 추모시「어머니사랑합니다」중에서- 김하영 (당시21세) 화 장 1975년 10월 4일 대구 출생 1994년 2월 대구 원화여고 졸업 1994년 3월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입학 1994년 문화인류학과 학회지 <사람> 편집위원 1995년 문화인류학과 학회지 <사람> 편집장 문화인류학과 학생회 기획부장 한총련 출범식 새내기 문예단 생활 주체 영남대 5월 투쟁본부 산하 오월 학살자 처벌투쟁 선봉대원 96통일문과대 여학생회장 출마 1996년 영남대학교 29대 총학생회 정책2부장 영남대학교 총학생회 조국통일투쟁 주체 1996년 8월 범민족대회 참가도중 뇌사 1996년 9월 9일 운명 끝내살리라 |99| |98|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김영삼정권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