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page

완화했고, ‘자본 자유화’에 조응하는 정책을 폈으며, 2004년부터 쌀 수입을 단계 적으로 개방하기로 했다. 한국 민중들은 쌀수입개방문제를 중심으로 우르과이라운 드를 격렬히 반대했다. 이에 정부는‘신농정’정책을 제시하였으나 이는 결국 농민 들에게 고스란히 빚을 전가하게 되었고 농민들의 삶은 더욱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농민들은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기도 했다. 농수산물 수입개방 을 반대하며 투쟁하는 농민들에게는 폭력 진압과 구속으로 대응했다. 민족문제에 있어서 김영삼 정권 초기‘어떠한 우방도 민족보다 우선시 될 수 없 다’는 김영삼 발언에 탄력을 받고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였으나, 김일석 주석 사망으로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이후 조문파동과 주사파발언, 그리고 연세대 사태 등으로 정권의 반통일적 한계를 드러내었다. 반면 우르과이라운드와 OECD가입은 국내 재벌들의 이해와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노동시장 유연화, 자본 개방화 조치를 비롯한 일련의 구조조정 작업들이 시작된 것이다. 김영삼 정권의‘세계화’, ‘국가경쟁력 강화’외침이 무색하게 1997년 초부터 한 보 , 대농, 진로 등이 연이어 부도를 냈다. 시장 상황에 대한 판단 없이 무리하게 투 자하고 사업을 확장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세계 경제의 장기불황으로 인한 과잉 생산과 금융자본의 팽창이 한국 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외환보유고를 해 결하지 못하고 결국 IMF 관리체제로 들어가게 되었다. 노동자 민중은 고용불안과 생활파탄에 시달리게 되었다. 끝내살리라 |7| 1993~1997 김영삼 정권 김영삼 정권은 군부정권에서 민간정권으로 이양되었다는 점과 자신의 오랜 야당 시절 경력을 내세워 밀실야합을 통한 3당 합당의 부도덕성과 변절을 감추려고 했 다. 1993년 집권초기 고위공직자와 국회의원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실시 등 일부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이는 곧 자신들의 치부와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한편 경제 회복과 안정을 주요 과제로 내세웠으나 선진 자본주의의 시장개방 압력이 가속화 되는 상황에서 이렇다 할 돌파구를 찾지 못하였다. 김영삼 정권은 국가경쟁력을 높인다는 이슈 아래 단기적인 경제회복에 중점을 두면서 임금을 억제하며 노동통제를 강화하고 한편으로는 노사협조주의를 유포하 는 정책을 폈다. 한국노총-경총간의 임금합의를 통한 임금억제 등을 공기업에 먼 저 관철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체 기업으로 확산하려는 정책을 시도하기도 했다. 1994년 한국통신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을 시발로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이에 맞서 노동조합을 민주화하고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권은 노동자 투쟁에 대 해 무노동무임금 적용, 3자 개입 적용, 손배가압류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탄압 했다. 그리고‘협력적 노사관계 구축과 탄력적인 고용정책을 편다’는 기조하에 노 동법 개악을 시도했다. 결국 1996년 12월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하 기에 이르렀고,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전국적인 정치총파업을 벌였다. 한국전쟁 이 후 최초로 성사된 정치파업을 통하여 노동자들은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깊이 인 식하게 되었고, 1998년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 결의에 따라 권영길 위원장을 대선 에 출마시켜 민주노동당 건설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김영삼 정권은‘세계화’라는 허울 아래 우르과이라운드 협상을 타결하고 OECD 에 가입했다. 이어 외국 제품이 한국시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규제조치들을 |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총 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