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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미아전화국 창동분국 시절 기독교‘신우회’활동 등을 통한 성실함으로 조합원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91년 4월의 대의원 선거에서 어용지부장을 제치 고 선출되었다. ’91년 봄 한국통신은 사용자와 어용노조가 합작하여 노동조합 민주화 투쟁에 대한 탄압이 노골화되던 때였다. ’82년 노조가 창립된 이래 한국통신노동조합은 조합원위에 군림하여 노동조합을 자신의 출세 도구로 이용해왔던 소수 어용세력 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들은 사측과 결탁하여 ’91년 11월 11일 데이콤과의 국제전 화 경쟁체제 도입에 따른 체신부의 부당간섭에 항의하던 22명의 동지들을 해고 등 중징계하는 등 민주노조의 싹을 아예 없애려 기도하였다. 또한 창동 반장이던 박문형 동지도 해고를 당하자 동지는 농성에 적극 가담하면서 본격적인 노동운 동을 하게 되었다. 동지는 어려울 때 노동조합 민주화추진위원회를 확대 강화하여 투쟁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일으켜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한국통신은 ’93, ’94 년에는 노동조합을 해산하고 어용산별 노조를 만들려는 공작을 펴는가 하면, 어 용위원장, 지부장 임기를 3년 연장하는 등 노조를 탄압했다. 이에 동지는 한국통 신 측과 어용노조 양측의 반민주적 음모에 맞서 민주노조 사수에 헌신하였다. 동지는‘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날도 부모님 걱정하신다고 집에 알리지 않 고 상을 당한 동료 집에 가서 함께 밤을 새우며 위로하는 등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했다. 동지는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동지들을 뒷받침하며 궂 은 일을 도맡아 했고, 의지가 부족하여 뒤로 쳐지는 동지가 있으면 며칠 밤을 대 화해서라도 동지를 다시 투쟁의 대열에 끌어올리곤 하였는데‘94년 4월 17일 백 혈병으로 운명하고 말았다. “동지를 한마디로 집약하여 표현하자면 어떤 것이 좋을까”라는 질문에 같이 활 동했던 동지가 스스럼없이“헌신적인 자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동지는 헌신이 무엇인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진정한 노동운동가였다. 동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추모집「나는 반드시 일어나라라」를 ’96년 발간하 였다. 김낙성 (당시39세) 금촌 기독공원묘지에 안장 1955년 12월 3일 충북 음성 출생 1975년 12월 19일 용산공업고등학교 통신과 졸업 1991년 5월 한국통신노조 개혁모임에 참가 1992년 4월 서울지방본부 대의원 피선 1992년 7월 서울지역‘노민추’결성 1993년 3월 조합집행부의 징계기도에 맞서 저지 투쟁 전개 1993년 11월 ‘전국노민추’결성 1993년 12월 복지후퇴 및 직선제사수 투쟁위원회 결성 1994년 4월 17일 백혈병으로 운명 끝내살리라 |41| |40|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김영삼정권 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