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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살리라 |385| |384|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대한 정당한 배상이어야 할 사안들이 정부에 의한 시혜적 조치 16) 차원의 보상 개념으로 전 도되고 말았다. 한국 사회 과거청산 작업은 단적으로 말해 진상규명과 금전적 보상을 맞바꾼 꼴이 되고 말았다. 민주화보상법이 갖는 진상규명의 무력함은 신청인의 입증 책임으로 돌려졌다. 신 청인들이 입증해야 할 판결문, 수용증명서 등의 서류들은 접근성에 있어 개별 신청인 보다 오히려 정부차원의 업무협조가 가능한 민주화보상위원회가 용이하다. 사회에 공권력에 의 한 조작사건으로 알려져 있는‘인혁당’ 17) 이나‘자주대오’ 18) , 소위 말하는 활동가 조직, 간 첩단 사건 등의 경우에 대해 국가는 공식적으로 해당 사건들의 조작여부를 확인한 바 없 다. 이런 사건들의 경우 적절한 진상조사가 없을 경우 당시 유죄판결을 받았던 판결문이 심의의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는상황이다. 유가족과 단체들의 법제정 요구를 2년여 미루다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보장하지 않은 민주화보상법은 정치적 타협으로 일관된 졸속입법이었다는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19) 특히, 신청인들의 항거행위를 입증할 수 있는 관련자료들이 구속과정에서 압수되었거나 수배 중 증거인멸을 위하여 폐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음을 감안해 본다면, 당시 재판부 또는 검찰, 경찰의 수사자료를 폭 넓게 활용하지 않고 진상규명은 불가능하다. 어찌보면, 기소과정에서 축소되거나 생략된 자료, 아니면 과장되거나 조작된 유죄판결 내용이 평가 의 주요 근거가 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적 조건에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사건들 20) 이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 원회의 진상규명 관련 조사권한은 유명무실하다. 13) 심의 자료는 신청인이 구비해 제출한 서류에 근거한다. 민주화보상위원회가 과거청산적 성격을 갖는 기구임에도 불구하고 법제 정 당시부터 불완전한 과거청산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진행된 과거청산 작업의 대부분이‘보상’으로 자리잡으면서 오히려 국민 화합과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법제정의 취지가 무색해졌다. 진상규명 없이 진행되는 민주 화운동과 금전적 보상의 치환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피해를 당하거나 희생된 가치들을 궁극적으로 파편화 시킨다. 애초 보상의 제기는 유족들이나 관련단체들의 요구에 의한 것 이 아니었다. 유족들이나 관련단체들의 최우선 요구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희생된 죽음에 대한 공적인 평가였다. 보상 우선주의는 과거의 국가범죄 및 민주헌정질서 파괴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마련하기 위하여 군부정권들이 활용했던 방식이다. 전두환 정권이나 노태우 정권은‘5∙18 진상규명’과‘책임자 처벌’이라는 사회적 요구 를 무마하기 위한 수단으로 급조된 보상을 선택하였다. 14) 이후 대부분의 과거청산 작업이 광주보상법을 근간으로 하여 졸속 제정되면서 진상규명을 통한 사회적 재평가가 아니라 개별보상을 우선시 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민주화보상법 역시 광주보상법을 상당부분 원 용하여 제정되었다. 그러나 광주보상법의 직접적 적용을 받는 5∙18은‘5∙18 특별법’제 6조를 통하여 광주보상법에 의한‘보상’은‘배상’으로 본다고 규정함으로써 국가권력의 위법한 행사에 대한 정당한 배상임을 법적으로 확인하였지만, 민주화보상법을 비롯한 다 른 과거청산 관련 법률들은 이에 대해 여지를 두지 않고 있다. 15) 국가권력의 위법한 행사에 13) 민주화보상법 제20조(사실조사 및 협조의무)는“① 위원회는 이 법에 의한 보상금 등을 위하여 관련자, 증인 또는 참고인으로부터 증언 또는 진술을 청취하거나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검증 또는 필요한 조사 등을 할 수 있으며, 행정기관 기타 관련기관에 대하여 필요한 협조를 요청할 수 있다. ②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협조를 요청 받은 행정기관 기타 관계기관은 다른 업무에 우선 하여 이를 처리하고 그 결과를 지체없이 통보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별도의 강제력은 두지 않았다. 14) 전두환 정권은 5∙18을‘폭도의 사주와 선동에 대한 공권력 행사과정에서 빚어진 사고’로 정형화하고 1980년 6월 6일 위로금 명 목으로 즉각적인 보상조치를 취하였다. 노태우 정권은 1990년 8월 6일 민자당이 단독처리한 광주보상법을 통하여 진상규명 없는 보상을 서둘러 시행하였다(이영재, 2004; 75). 하지만 결국 전∙노씨는 1995년 12월 제정된‘5∙18 특별법’및‘헌정질서파괴범 죄의공소시효등에관한특례법’의 제정 이후 1997년 사법적 처벌을 받았다. 15) 1990년 광주보상법의 제정 당시 평민당은‘5∙18광주의거희생자의명예회복과배상등에관한법률’, 해직교수들은‘5∙18광주민중 항쟁피해자의명예회복과배상등에관한법률’을 제안함으로써‘보상’이 아닌‘배상’을 분명히 제안하였으나 민자당의 단독처리 과 정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민주화보상법의 제정 당시에는 이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16) 민주화보상법 제1조(제정목적)에 보면, “이 법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희생된 자와 그 유족에 대하여 국가가 명예회복 및 보상 을 행함으로써 이들의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을 도모하고…”로 되어 있다. 제6조(보상원칙)은“관련자와 그 유족에 대하여는 관련자 의 희생의 정도에 따라 보상하되, 그 생활정도를 고려하여 보상의 정도를 달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9조(생활지원금) ① 항은“위원회는 관련자에 대하여 그 생활을 보조하기 위한 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17) 천주교인권위원회, 2003, 「인혁당재건위사건자료집」참조. 18) 인권운동사랑방, 「인권하루소식」중 제2면, “이적단체조작 이제 그만!”(1998. 11. 11.일자) 참조. 19) 이재승 교수는 민주화보상법에 대하여“국가범죄를 국가범죄로 다루지 않고‘민주화운동’이라는 논공행상 차원에서 접근함으로 써 국가의 범죄자 모습을 분식해버리고, 국가책임을 광범위하게 완화시키고 있다. 이 법은 특히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에게 다시 한 번 공적 심사를 받도록 요구함으로써 적반하장의 대표적 사례라고(2004; 46)”평한다. 20) 청계피복노조 아프리점거농성사건, 3당 합당(민자당) 반대시위 사건, KBS별관 점거농성사건, 한준수 전연기군수 양심선언 사건, 대우어패럴노조탄압사건, 미문화원점거농성사건, 구로구청 투표함 사건, 김기설 사망사건, 동일방직 노조사건, 오송회사건, 전교 조 결성관련 해직 사건, 5∙3 동의대 사건(대한변협, 「인권보고서」, 2002;496-499쪽) 외 민주주의학생연맹 사건 등 이적단체 관 련 사건들이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정받았다.